혁명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귀족을 곱게 보지 않았다. 에투아르의 가문도 화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조부도, 외조부도 모두 '배를 불린 부르주아지들' 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분노한 군중들에게 살해당했다. 그 군중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행하는 의술에는 감탄하고 감사하면서도, 결국에는 그를 추방했다. 어머니도 함께였다.
혁명이 일어난 그날 밤, 에투아르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큰 소리를 치며 들어온 남편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그대로 붙잡혔을 것이다.
평소에 한 번도 그러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던 사람이 그녀를 질질 끌다시피하고 싫다는 그녀의 말에도 강제로 입고 있던 옷을 벗기더니 무슨 거적떼기같은 옷을 입혀주었다. 빠르고도 간결한 그의 상황 정리를 들으며 그녀의 저항 또한 점점 줄어들었다.
그녀는 군말 없이 피난길에 올랐다. 12인승 옴니버스의 꼭대기층에, 눈내리는 한겨울 앉아서 멘델스존 가문의 하녀로 위장하고 국경을 넘었다.
그는 무사하지 못했다. 집은 불탔고, '다르게 태어난' 귀족들보다 자신들과 다를 바 하나 없으면서 돈 좀 많다고 귀족인 척 젠체했다는 이유로 그는 다른 귀족들보다 몇 배는 많은 분노를 샀다. 금화는 약탈당했고 계약서들은 불에 던져졌으며 동이 트도록 폭행이 이어졌다. 아마 그 분노한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과 같은 꼴이 된 그를 보면서 속시원해 했던 것 같다.
죽지는 않았다. 들은 말에 의하면 폭행 과정에서 생식 능력을 잃었고 그토록 사랑하던 가족의 긍지였던 은행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렸다고 했다. 다행히 일찍이 혁명에 가담했던 누이가 있던 덕에, 그 누이의 집에서 몸을 의탁하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그 이야기까지 들은 뒤 에투아르는 그에 대해서 더 이상 알아보지 않았다.
에투아르는 가정교사로 일하며 적당한 월급을 벌고, 전보를 배워서 생계를 유지했다. 좋아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떳떳한 일이었고 아주 못할 만한 짓도 아니었다. 적당히 돈이 모여서 만일 그를 다시 찾아가고 싶었더라면 찾아갈 수 있을 만한 돈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돌아올 부담이 걱정되었다. 정신나간 사람을 평생 남편으로 두고 헌신하라고? 에투아르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혼자 목숨을 건사하기도 벅찬 와중에 아무리 자신에게 헌신했고 큰 은혜를 베푼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희생까지 할 자신은 없었다. 이왕 그가 신분을 위조까지 해서 타국으로 보내 준 것, 그 기회를 허투루 쓸 생각 없었다.
이후로도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있었다. 자식은 없었고 친구는 있었다. 외로운 과부라기에는 그럭저럭 즐거운 삶을 살았다. 보통 이런 전개면 자신도 죽고, 자신을 위해 스스로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았던 남자를 위해 시간을 한 번만 돌려 달라고 하기 마련이지만 에투아르는 잘 살아냈다. 그렇게 무덤덤하게 살 때, 가끔씩 둔한 통증처럼 떠오르는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의 기억만 아니라면 평범하게 잘 살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투아르는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 살다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을지 그렇지 않을지에 대해서도 모른다. 어쩌면 에투아르의 숨이 다해가는 이 순간에도 그는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계속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사랑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 희생을 했다는 게 곧 사랑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건 자신을 향한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의무다. '따뜻함은 없었지만 서로를 향한 사랑은 숨기고 있었다' 는 둘의 관계에서는 틀린 말이었다. 그는 에투아르에게 제법 만족했고, 에투아르도 그에게 만족했다. 그런 관계였다. 뜨뜻미지근하고 평균적인 관계였고 아마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둘은 끝까지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숨이 끊어지는 순간이 다 되어서 그의 생각을 하는 것도, 사랑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미련이고, 죄책감이고, 미안함이고,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의 손을 놓을 때 자신의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그와 결혼할 때 자신의 나이 서른이었다. 그러니 십오년을 함께 했던 사람이었고 그건 에투아르의 인생에서 그가 가장 오래 함께한 남자였다는 의미기도 하다. 마지막 순간 그가 자신을 위해 대신 희생했으니 자신이 그를 살리고 싶다-그런 생각은 아주 잠깐이나마 들었지만 이제는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그녀의 기억에 더 깊게 각인된 것은, 결혼한 뒤 니스로 갔던 신혼여행에서 종아리를 주물러 주던 부드러운 손, 오페라 극장에서 나오던 추운 겨울 밤 그가 벗어 주었던 외투,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날이었지만 그가 사 왔던 꽃다발, 마주앉아서 저녁 식사를 하며 시답잖은 농담을 하자 그가 지었던 미소, 그런 것들이었다. 고통은 둔했지만 행복은 날카롭게 가슴을 가로질렀고 그럴 때마다 에투아르는 그가 문득 그리웠다.
착한 사람이었다. 자신과 관련되지 않은 일이라면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는 에투아르와 달리 주기적으로 빈민들을 위한 자선 행사를 열고 고아들과 과부들을 찾아다녔다.
다정한 사람이었다. 사랑이 없는데도 사랑보다 더 오래가는 따뜻함을 가지고 기념일들을 챙겼으며 에투아르의 작은 성취에도 박수를 쳐주었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흠잡을 곳 없이 아름답고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게 하는 사람이었다.
낭만적인 사랑이라면 환장하는 에투아르였지만, 시간을 다시 되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완벽한 남자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을 다시 되돌아간다면 그때는 그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그가 이번 생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기를, 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가 믿었던 신께 기도해 봤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에투아르는 스물 일곱 살의 춘삼월로 돌아와 있었다. 1830년 3월 11일,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와 에투아르 드 베를리오즈의 혼담이 성사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