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천장이었다. 벽감에 쏙 들어가 있는 좁아터진 침대, 이건 분명 아델의 침대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예비 약혼자' (약혼 후보자라고 해야 하나, 이 무슨 이중적인 말인가 싶지만 말이다) 가 찾아오기 전날 이제 다시는 같이 못 자게 될 수도 있으니 지금 많이 같이 자 두자고 아델에게 졸라서 그대로 잠들었었다. 아래층에서 네티가 냄비로 국자를 저으며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깥에서는 수탉이 울었고 어렴풋이 인사를 나누는 소작농 몇 명의 말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바스락거리는 이불의 촉감은 기분이 좋았고 적당히 체온으로 데워져 약간은 후끈하기까지 했다. 이불을 반쯤 걷어차고 자고 있는 아델은 아직 곤히 잠들어 있었다.
만일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어느 날로 돌아가고 싶어? 그런 질문을 망명한 뒤 사귄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나누었던 기억이 있었다. 에투아르의 답은 그날그날 달랐던 것 같다. 가끔은 바로 전날 저지른 치명적인 주식 투자 실수를 만회하고 싶다고 답했고, 가끔은 그냥 태어난 날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가끔은 아버지가 죽던 날로 돌아가고 싶었고, 가끔은 혁명이 터진 그날로 돌아가는 건 어떨까도 고민했다. 연애를 하고 있으면 어떤 끝내주던 잠자리를 하던 날이라든가, 그 사람을 처음 만난 날로 돌아가겠다고도 말했다.
'어느 날로 돌아가고 싶냐', 이 질문은 '네 가장 큰 행복' 또는 '네 가장 큰 후회' 는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그러니 그 틈에 펠릭스 멘델스존과의 삶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그가 주는 것은 행복이었지만 최고의 행복은 아니었고, 그에게 해주지 못한 일들은 후회였지만 최악의 후회는 아니었다. (에투아르의 가장 큰 후회는 빚을 내서 투자를 할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전신기술 회사의 주식을 몇 주밖에 매수해 놓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 이 갑자기 주어진 두 번째 삶의 시작이 이날이라는 것이 어찌 놀랍지 않을까. 기억이 잘 나지도 않는 이 희미한 날. 왜 하필 이날로 돌려보내 준 걸까. 누군가가 흑마법을 써서 시간을 뒤로 돌려 주었다면 그 사람은 이 결혼을 막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이 그와 다시 한 번 잘 되기를 바랐던 것일까.
이렇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를 어떻게 써야 할까. 돈을 잔뜩 번 뒤 신대륙으로 건너가 버릴까. 혁명을 막아 볼까. 폭로되었던 가십들을 가지고 사교계를 쥐고 뒤흔들어 볼까. 금방 죽을 노인네랑 결혼하고 유산을 가로채 볼까. 위대한 예술가들의 후원자가 되는 건 또 어떻고. 그런 걸 다 떠나서 죽기 전에 마저 못 읽었던 나머지 셰익스피어 희곡 12권도 읽어 볼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면 그의 청혼을 거절해야 하나, 받아들여야 하나.
당시에는 사랑 없는 결혼이라니 용납할 수 없다며 부모님께 울며불며 떼를 썼다. 부모님도 사랑 있는 결혼을 하지 않았냐, 어릴 적 소꿉친구였다며, 편지 보면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왜 나는 안 되냐 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돌이켜 보니 그가 있는 자리에서도 그랬었다. 그건 좀 미안하네. 이번 생에서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말아야겠다... 에투아르는 세수를 하고 대충 머리를 빗었다.
베를리오즈 가는, 그래 보이지 않았겠지만, 꽤 빚이 많았다. 1810년대까지만 해도 상당히 잘 나가던 집안이었지만 20년대에 들어가며 철도와 증기기관이 갑자기 발전했고, 농사를 지어주어야 했던 노동력들은 도시로 유출되었다. 에투아르가 기억하던 푸르르던 들판은 그녀가 죽을 때쯤에는 황무지나 다름없어졌었고, 시끌벅적하던 마을에서는 조용한 성당의 종소리와 지친 사람들의 발걸음소리만이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었다. 고향에 끝내 돌아가지 않은 것은 그 모습을 보기가 두려워서도 분명 있었다.
에투아르의 아버지, 닥터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땅을 사랑했다. 어느 프랑스인이 그렇지 않겠냐만 그는 유독 애착이 강했다. 몇십 킬로미터 이상은 본인이 사랑하는 동네를 떠나지 않으려고 했고 어떻게든 자신의 땅을 푸르게 지키고 싶어 했다. 그런 닥터 베를리오즈에게 작위는 별로 귀한 것이 아니었고 돈이 훨씬 귀했다. 그럴 때 찾아온 은행장의 아들은 딱히 심각한 결격 사유도 없어 보였고, 꽤 적절한 구혼자였다. 딸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닥터 베를리오즈는 오히려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에투아르의 사랑은 불을 쫓아 날아다니는 나방의 날갯짓보다도 가벼워서 순식간에 그 대상이 바뀌곤 했으니 말이다. 사랑 하나만으로 연을 맺어 주었다가, 그들을 맺어주었던 유일한 것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양측 모두에게 비참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아무나, 에투아르를 매일 싱글벙글 웃도록 하지는 못하더라도 꽤 만족시켜줄 만한 사람을 잡는 편이 낫다...닥터 루이 베를리오즈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속이 상하게도 그의 진단은 꽤 정확했고, 에투아르는 실제로 결혼에 만족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어땠을까. 그는 작위가 필요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지식을, 그의 아버지는 부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는 명망이라는 무기를 손에 넣고 싶어했다. 평판 좋은 닥터 베를리오즈는 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이었고 동시에 돈만 많은 '졸부 집안' 의 이야기를 들어 줄 정도로 열려 있으며 돈의 중요성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토록 좋은 조건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그 또한 에투아르를 싫어하지 않았다. 짜증은 꽤 냈지만 그거야 보통 대부분의 부부가 그렇지 않던가. 그는 그녀와 대화하는 것을 즐거워했고 에투아르에게도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유달리 빠르게 흘러갔다. 그는 자신과 완전히 다른 사람인 그녀를 불편해 하면서도, 가끔은 궁금해 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의무감은 진정한 즐거움으로 바뀌었노라-라고, 회귀 전의 펠릭스가 언젠가 이야기해 주었었다.
그렇다면 이 결혼을 해야 하는가?
에투아르는 이 결혼이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있다. 이번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가지고 미리 함께 외국에 터전을 꾸려버릴 수도 있다. 혁명 전 전조 증상이 아주 없던 것도 아니었으니 그 또한 에투아르의 직감이 유달리 예리하다고 생각할 뿐 더 이상 의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자신이 그를 지켜야 하는가?
과거로 돌려보내달라고 부탁한 적 없다. 그 대가로 그를 행복하게 해 달라 그런 소원은 더더욱 빈 적 없다. 아버지의 걱정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몇십 년 전으로 돌아와도 에투아르는 여전히 부모의 개입 없이 혼자서 결혼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나이 정도는 됐다. 정 아버지가 마음에 걸린다면 자신이 기억하는 정보를 가지고 돈을 잔뜩 벌어버려 베를리오즈 가문이 굳이 그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농장을 꾸려나갈 수 있게 하면 된다. 그러면 그는 아마 베를리오즈 집안과 비슷한 다른 집안을 찾아가겠지. 그리고 그가 간 곳에서는 또 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고, 그는 다시 한 번 같은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녀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과거로 다시 돌아온 지금, 둘은 남이나 다름없지 않던가.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에투아르는 그에게 진 빚이 없었고, 그는 에투아르에게 지운 빚이 없었다.
그러니 에투아르의 결론은, 그를 지킬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조금 더 심약한 여자였다면, '그가 나와 결혼하는 바람에 귀족이 됐고, 그래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더 비난을 받았던 거야...'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투아르는 그렇게 아둔하지 않다.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다른 귀족과 결혼했을 테니 그가 이전의 생에서 그렇게 된 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에투아르 탓이 아니었다. 그리고 귀족이 되지 않았더라도, 단순히 귀족층뿐 아니라 부르주아들에 대한 분노까지 한꺼번에 터져나왔던 당시의 혁명 속 부유한 그가 빠져나올 방법은 얼마 없었을 테다. 따라서, 안타깝게도, 에투아르가 뭘 어떻게 하든 그를 구해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중요한 건 이미 귀족인 자신의 지위를 어떻게 지키냐는 것인데. 아무리 자선을 많이 베푼 귀족이라도 소용없다는 건 이미 알았다. 당장 그만 해도 그렇게나 자선을 베풀었는데, 좋은 꼴은 못 보지 않았는가. 죽지 않은 게 그나마 좋은 꼴인 편이라니. 그런 '평판 반전' 에 의존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귀족 작위를 포기하는 것이 제일 확실하겠지만 포기를 하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다. 아주 그럴싸한 이유가. 그리고 에투아르는 방금,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아주 그럴싸한 이유를 떠올렸다. 바로, 사랑의 도피 말이다.
에투아르는 그의 청혼을 거절하기 위해 사뿐한 마음으로 옷장을 열었다.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의 옷 몇 벌과 조금 더 낡은 옷 몇 벌이 보였다. 예의는 지키는 게 옳을 테니 좀 더 새 것이던 옷들을 살펴보던 에투아르의 손이 문득 파란색 원피스에서 멈췄다.
'파란색을 좋아하는 편인가요?'
그때 에투아르는 안시의 푸르른 호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 가죽으로 장정한 베르길리우스 전집이 집으로 배달됐고, 그로부터 또 얼마 뒤에는 에투아르의 방 화병에 흰색과 파란색, 초록색이 어우러진 꽃이 장식되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보석상에서 터키석 목걸이가 도착했고, 그는 에투아르와 동행할 때면 종종 다양한 푸른색의 크라바트를 매고 왔다. 눈치채지 않을래야 눈치채지 않을 수 없는 배려였다.
그리고 에투아르는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