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은 일제 식민지 시대 문학 활동을 왕성히 하다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뜬 천재 시인이다. 1910년, 서울에서 김해경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났으며, 1937년 도쿄에서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이상은 식민지 시절 일제의 식민 통치에 대한 불만을 문학에서 드러냈다. 이상은 『권태』 등 많은 작품들에서 식민지 지식인의 절망을 표현하였고, 『날개』와 『오감도』는 1930년대 일제가 한국에 대해 내선 일체 정책을 강행했던 시기에 삼족오를 모티브로 창작한 작품이다. 이상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로 건너가 유학을 결심할 정도로 서구 문물에 대한 열정이 깊었다. 결국 이상은 서구 문물을 조선에 유입시키는 일제는 제대로 된 ‘근대’를 가지고 있는가 확인하고 싶어하여 일제로 떠난다. 이상은 최종적으로는 프랑스로 건너가고자 하였으며, 일본은 위한 발판 격이었다.
하지만, 도쿄에 도착하자 마자 이상은 ‘모조 근대’만을 발견하게 된다. 일제의 수도 기차역 도쿄역은 경성역보다 크기만 컸고, 모양은 같았으며, 기대하고 있던 마루노우치 빌딩은 생각하던 이미지가 네다섯 배는 훌륭하다고 느낄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이후 이상은 막역한 사이였던 김기림에게 “기림 형, 기어코 동경 왔소. 와 보니 실망이오. 실로 동경이라는 데는 치사스런 데로구려!”라고 편지를 적어 보낸다. 이상이 생각했던 서구의 문물은 동경에 없었던 것이다.
동경에 도착한 직후, 이상의 폐결핵은 악화되었고, 새 출발의 시작점으로 삼으려 했던 동경에 대한 환멸감으로 인해 이상은 자괴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라는 편지를 조선에 보낸 후 햇빛조차 들지 않는 싸구려 방에 혼자서 은거해버린다. 이후, 1937년 2월 동경에서 사상불온혐의로 체포되며, 심한 폐병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한달만에 석방된다. 그리고 그 후 4월17일 새벽 4시 이상은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다. 부인 변동림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기 전 그의 마지막 말은 "멜론이 먹고싶어"였다.
이상의 유해는 화장되여 가장 친했던했던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한다. 이후 김유정의 유해는 화장하여 한강에 뿌려졌고 이상은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었으나 관리하는 자가 없었고 한국전쟁 후에는 미아리 공동묘지가 사라지며 이상의 유해는 사라진다.
이후 이상은 일제 강점기의 건축사, 시인, 작가, 소설가, 수필가로 이름을 남겼다. 출판사 문학사상사에서는 이상을 기리며 이상문학상을 매년 시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