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시기였던 1930년대에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일운동을 전후로 1920년대 이후 한국 언론매체에 아일랜드의 언급이 급증한다. 아일랜드는 1919년 1월 21일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상이 1930년대 일제의 지배를 받던 조선에 살고 있었으며, 1930년대에 가장 활발한 모더니즘 작품들을 창작했다는 점이다. 1930년대는 아일랜드에서 모더니즘 문학을 꽃피우던 제임스 조이스가 신화기법을 사용하여 작품을 창작하던 시기이다. 여기에서 이상은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은 아일랜드의 독립 소식을 들었고, 제임스 조이스가 사용한 신화기법에 관해서도 접했다. 이상은 평소 영문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동료 문인들과 영문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영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서양 작가들을 언급한다. 게다가 이상은 평소 서구 문물을 동경해 왔으며, 서구 문물에 적응하기 위해 일제의 수도로 떠나기까지 했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이상이 작품에 모더니즘 신화기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에는 <구인회>와 제임스 조이스가 유의미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상이 1934년에 <구인회> 소속으로 활동한 것에 더욱 초점을 뒀다.
<구인회(九人會)>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예술인 모임이다. <구인회>의 문학적인 성격을 논함에 있어서는 모더니즘의 언급을 빠트릴 수 없다. <구인회>는 한국에서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이 본격적으로 꽃피게 하는 매개체였다. 한국의 모더니즘은 1930년대의 식민 지배 상황 속에서 발달한다. 일제는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심각해진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을 군사 기지의 목적으로 중화학 공업을 발달시키고 급속한 도시화를 진행한다. 한국에서의 1930년대 모더니즘은 정치적 상황의 악화, 일제의 시장 확대 정책의 심화에 따라 급격한 속도로 도시화되던 서울을 발판으로 심화되었고 지속된 것이다.
<구인회>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 서구 현대문학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작품으로 활발히 이를 표현하며, 서구 모더니즘 문학을 한국에 자리잡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서구 모더니즘 문학에서 신화기법은 당시 제일 큰 관심사였다. 이상이 이들과 어울렸기 때문에 이상의 모더니즘 작품은 <구인회>에서의 활동으로 인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나 이상과 막역한 사이였던 김기림은 유학파로, 서구 모더니즘을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여왔는데, 그의 말을 통해 김기림 또한 이상 못지 않게 서양 신화에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상은 스스로도 모더니즘에 대해 관심이 있었지만, 가까운 이들의 영향을 받아 신화기법을 문학에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