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쪽에서 2호선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기억할만한 풍경이 있다. 당산과 합정 사이, 한강 위를 달리며 10km 이상 먼 곳 까지 탁 트여 있는 서울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 에세이의 주인공은 바로 이 풍경을 가능하게 한 구조물, 당산철교다.

이 다리는 수많은 한강 횡단 구조물 가운데 유일한 타이틀을, 그것도 두 가지나 보유하고 있다. 한 가지는 당국의 판단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고 재건축된 유일한 교량이라는 타이틀이다. 이 점에서 이 다리는 절반씩 재건축이 이뤄졌던 여러 교량들, 그리고 상판이 낙교(落橋)해 전면 재시공이 이뤄졌던 성수대교와는 다르다. 또 하나의 타이틀은, 이 다리의 운명을 놓고 전문 학회(대한강구조학회)와 정부(서울시) 사이의 논쟁이 벌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다. 이 에세이는 이 논쟁을 좀 더 치밀하게 검토하는 한편, 실제로 다리가 끊어진 다음 교통의 세계에서 있었던 일들을 묘사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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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구 당산철교의 모습. 서울특별시, 『서울의 다리』, 서울특별시, 1988: 1-2쪽.

당산철교 철거 논쟁

이야기의 시작은 성수대교 상판 붕괴 사고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경 일어난 이 사고는, 교량의 시공 부실, 그리고 불충분한 유지 관리라는 두 원인이 결합되어 일어난 일이었다[1]. 멀쩡해 보이던 다리가,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개통된지 단 15년만에 붕괴된 사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주요 건축물에 대한 불신이 만연했고, 실제로도 많은 결함이 발견되었다.[2] 우려의 시선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결함이 보도를 타기 시작했던[3] 당산철교에 집중되었다. 적어도 1992년부터는 이 다리 위로 지나던 열차는 30km/h로 서행하고 있었다.[4] 그런데 이 시기 수도권망의 '지옥철'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강서 지역과 영등포 지역에서 서북 지역으로 넘어오는 유일한 도시철도였던 순환선의 고리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대체 경로인 5호선 하저터널을 기다려야만 했다.

여기까지는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5호선 하저터널이 개통과 당산철교의 철거 시점이 임박해 가면서 일어난 사회적 논란은 한국 공학사에서 보기 드문 방식으로 진행된다. 당산철교의 전면 철거를 결정한 서울시의 방침에 대해, 한국강구조학회가 학회 차원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공학자들이 학회 차원에서 정부의 결정에 반발하는 상황은 매우 이례적이고, 이후에도 사례를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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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구당산철교의 강구조. 장석윤, 강영종, 배두병, 변성구, 용환선, 유철수, 이기홍, 이희현, 최강희, 당산철교 현안에 대한 좌담회, 한국강구조학회지, 7권 4호, 1995: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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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세로보와 레일의 위치 관계에 대한 도해. 서울특별시, 당산철교 철거 및 재시공 관련 철거방침 결정경위 재시공내용 및 시민교통대책, 1996: 도면 #2(30쪽).

이 논쟁의 논점을 확인하려면 구당산철교의 기본 구조를 알아야 한다[5].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그림 1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주 트러스다. 이 구조물이 모든 하중을 교각으로 전달한다. 이 트러스의 중간 부분에 열차가 주행하는 강구조물이 자리잡고 있다. 이 가운데, 가로보는 트러스와 직접 연결되어 궤도에 실리는 하중을 트러스로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세로보는 가로보 사이에 배열되어 궤도를 지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철교는 이들 강구조 외에 따로 도상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무도상 교량이었으며, 침목은 세로보에 체결되어 있었다. 보선반원들의 발 아래로 성난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이 보이는 이런 구조는 철도에서는 흔하다.

당시 수면 위로 두드러졌던 문제는 세로보에서 발견되어 나날이 커지고 있던 균열이었다. 이 균열의 원인은 그림 2의 중간열 우측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세로보를 가로보와 연결시키기 위해 가공하는 방법에 있었다. 시공 당시, 시공사는 가공 과정을 편하게 하기 위해 세로보 H빔을 직각 형태로 깎아 가로보에 붙였다. 하지만 대규모의 변형력을 받는 강재의 가공은 본래 호(arc, 弧)형으로 이뤄져야 한다. 세로보의 피로 파괴를 감쇄시키기 위해서이다. 세로보는 열차가 가하는 활하중에 눌려 가로보보다 조금 더 휘어지게 되며, 이 과정에서 가로보와의 연결 부위에는 금속 피로가 누적된다. 이 금속 피로가 연결 부위 가운데 특정 지점으로 집중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바로 호형 가공이다. 하지만 직각 가공이 이뤄진 결과, 열차가 달리면서 가해지는 하중은 각에 집중되고[6], 결국 절반에 가까운 세로보에서 균열이 진행되었다. 시는 세로보의 간격이 궤간(1435mm)보다 넓은 2m로 설계되어, 레일에서 내려오는 하중이 보를 궤도 중심 방향으로 변형시키면서 전달된다는 사실도 지적했다(그림 27). 균열은 활하중을 직접 전달받는 세로보 상부에서 극심했다(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