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Quotes
프롤로그: 소박한 집밥 같은 치유, 적정 심리학
- 왜 그럴까. 왜 심리치유 전문가일수록 현장에서 실패하는가. 사람 목숨이 경각에 달린 현장에서 전문가가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많은 경우 그렇다면 그때의 자격증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 트라우마 현장에서 피해자가 전문가에게 “도움이 되는 도움을 달라”고 절규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의 실체는 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도움’은 왜 도움이 되고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은 무엇 때문에 도움이 안 되는가.
- 사람을 정신의학적 관점, 질병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모든 게 단순 명쾌해진다. 거의 모든 걸 생물학적 원인이라고 설명하니 간단하기도 하다. 그에 맞는 약을 건네면 됐다. 그 순간엔 나만 알고 있는 내면의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의학적 설명에는 환자 누구도 토를 달지 않으니까. 오히려 그럴수록 더 전문가로 대우하고 그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접수해 주니까. 그래서 ‘의사(또는 전문가)’라는 느낌은 내게 늘 안전한 경험을 선사했다. 견제당할 수 없는 자격증의 성채 안에서 나를 찾아온 사람에게 나는 확고한 주도권을 쥔 전문가였다. 나를 찾아온 사람이 내 진료실을 떠나지 않는 한 그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자격증은 내게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 그 답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갈등하는 시간을 건너뛰더라도 마음을 덜 불편하게 했다. 자격증은 ‘내가 답을 가졌다’는 징표처럼 느끼게 해줬다. 그러나 청소를 끝내지 않은 더러움을 이불로 덮어놓은 것 같은 외면의 시간 속에서 사람에 대한 나의 근원적인 불안과 혼돈은 더 커져만 갔다.
- 진료실을 찾는 사람들은 버티고 버티다가 의사에게 기댈 수밖에 없겠다 싶은 심정이 되었을 때 병원에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자신에게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며 환자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다는 마음, 백기투항하는 심정으로 온다. 그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진료실에서 의사-환자 관계는 의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관계, 의사 중심의 관계라는 걸 의미한다.
- 사람의 삶에 마지막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외부적 환경이나 상황 등 그들의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람 존재 자체다. 막대한 명예나 부를 일군 사람이든 비극적인 트라우마 피해자든 그들의 외적 조건 이전에 그들이 한 명의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에 오롯이 집중하다 보면, 그들의 존재 내면에서 그들이 살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나는 돌에 새기듯 깨달았다. 두 집단을 양극단으로 해서 그 사이 어느 한 지점에 속하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는 진실이다. 그 깨달음은 내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정신과 의사들도 적지 않지만 이런 생각이 세상에 퍼지는 속도는 거북이 걸음이다. 현대 정신의학이 의학적, 과학적 영역의 문제를 떠나 산업의 문제가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산업의 힘이 임상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하다. 불안이나 우울 등의 문제가 뇌의 병이라는 일반적 인식에 의미 있는 틈을 만들어내려면 제약회사라는 거대 자본과 정부, 언론의 공고한 연결을 넘어서는 새로운 힘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1. 왜 우리는 아픈가
1. 자기 소멸의 벼랑 끝에서
나란 무엇인가?
- [스타가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대중이 그 점을 특별한 것으로 느끼고 좋아하기 시작하면 숨쉬는 걸 한 번도 의식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 호흡이 신경 쓰이듯 그때부터 ‘나’는 ‘나’를 의식하게 된다. 한참을 그렇게 지내다 보면 그것이 원래의 나였는지, 내가 만들어낸 하나의 상(像)인 건지 스스로도 혼돈스러워진다. 애초에 대중의 욕구와 취향에 맞춰 기획된 스타는 물론이고 출발선이 달랐던 스타들까지도 그런 의식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나는 나를 의심하고 추궁한다. 나는 진짜 나인 것인가?
2. 존재의 개별성을 무시하는 폭력적 시선
- 모든 아이가 다 다르듯 모든 노인도 당연히 다 다르다. 개별적 존재들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노인을 노인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이 전부인 존재로 바라본다. 노인이 아닌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런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폭력이다. 누군가와 생생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기체가 아닌 ‘노인 일반’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무례다. 그 시선은 그의 개별성을 몽땅 휘발시킨다.
- 자기 존재에 주목받은 이후부터가 진짜 내 삶
3. '당신이 옳다'는 확인이 부족할 때
-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인이 있어야 사람은 그 다음 발길을 어디로 옮길지 생각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해 안심해야 그 다음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너는 항상 옳다’는 말의 본뜻이다. 그것은 확실한 ‘내 편 인증’이다. 이것이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