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조예 따위는 없는 저, 그렇지만 좋아하는 그림, 좋아하지 않는 그림의 구분은 나름 명확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주관적이어서 누구에게 내세울 건 안되는 구분이지만 말입니다. 다만 그림을 보았을 때 제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 호기심이 가는 그림,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 좋습니다. 잊혀졌던 기억 속 한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 그림 안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그림은 더 좋습니다. 요즘 만난 그림 중 특히 김종학 화가의 그림이 딱 그러합니다. 그림 하나 보았을 뿐인데 머릿속으로 그림 너머 정경이 펼쳐지고 소리가 들리고 살갗에 그 공기가 여미는 듯하거든요.
‘설악의 화가' 혹은 ‘꽃의 화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김종학 화가는 40대 초 설악산에 칩거하여 40여 년을 설악산 자연을 그렸습니다. 28년간 자녀들에게 보낸 250통이 넘는 그림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김종학 작가의 그림을 인터넷 현대화랑에 들렀다가 처음 만났습니다. 바로 푸른 밤하늘 아래 샛노란 개나 사이에서 빛나는 보름달 그림 연작입니다. 그 그림을 보면서 밤과 개나리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지요. 제게 개나리는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아파트 둘레의 높은 회색빛 시멘트 담벼락을 물들이는 유일한 색깔이었습니다. 우중충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음을 가장 먼저 샛노란 빛깔로 알려주던 개나리, 그렇지만 밤의 개나리는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희 동네 담벼락을 비추던 가로등은 모두 노란 LED 램프, 그 아래에서는 노란 개나리 빛도 그저 바래 보일 뿐이니까요. 밝게 빛나는 도시의 가로등은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제 발걸음을 밝혀 주는 고마운 불빛이지만 너무나 강한 빛은 담벼락 위 길게 내려앉은 개나리나 전봇대나 모두 같은 색으로 퇴색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김종학, 개나리, 2004, 73*61cm
김종학, 개나리와 달, 2006, 112*145.5cm
김종학, 봄, 2004, 53*41cm
김종학 작가의 개나리와 달 시리즈를 보고서야 개나리는 밤에도 샛노랗다는걸, 짙은 밤하늘 외로이 빛나는 달 아래 개나리는 여전히 눈부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개나리는 보이는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봄이라는 것을요. 더불어 평범하기 그지 없던 나의 하루도 봄날, 이 달빛 아래에서 보석처럼 반짝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봄꽃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꽃이 있다면 바로 벚꽃이겠지요. 학창 시절 서울 밖을 나가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서울 촌사람인 제게 벚꽃은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낼 남산의 벚꽃길과 학원 다니러 한때 다녔던 여의도 벚꽃길이 전부였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서울 바깥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는지, 얼마나 멋진 곳이 많은지 제대로 알게 된 저, 친구와 짝꿍의 손에 이끌려 처음 서울 바깥에서 제대로 벚꽃을 만끽한 곳이 바로 계룡산 벚꽃길이었습니다.
김종학, 벚꽃만개, 2004, 46*53cm
울창한 벚꽃나무 사이로 지저귀는 새, 그 아래 벚꽃만큼 만발한 사람들을 누비며 느꼈던 설렘을 바로 김종학 작가의 벚꽃만개를 보면서 떠올렸습니다. 벚꽃이 아름다운 건 어쩌면 벚꽃과 함께 했던 행복한 봄의 기억이 많아서 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지요. 할머니 손에 이끌려 남산 벚꽃길을 산책하던 어린 제 앞에서도, 아버지가 밀어 주시는 자전거를 타고 누볐던 여의도 그 길에서도, 짝꿍과 처음으로 단둘이 데이트했던 서울대공원에서도 벚꽃은 눈처럼 내렸습니다. 벚꽃에 가린 그림 속 저 새를 보자니 흩날리는 벚꽃에 감싸안겼던 우리들의 찬란한 봄이 떠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