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는 것은 아주 재밌는 편이다. 작년 초봄 거리두기 하면서 열성적으로 칩거 중일 때, 하루 일과를 마치고 해질녘의 북한산을 바라보며(실은 해는 북한산 쪽으로 지지 않는다) "곤경의 시대에 이다지도 건실하게 살고 있다니, 강호는 나를 품을 그릇이 되겠는가?"하고 자아도취를 음미하는 시기가 있었다. 요즘이 그때와 흡사하다. 18년도에는 악재가 연달아 찾아와서 "내가 고난을 이기고 레벨업을 하면 고난도 레벨업을 하기 마련"이라는 명문을 떠올린 적이 있다. 지금은 한층 레벨업 된 고난을 이겨내고 이 다음 레벨의 고난을 기다리는 여유를 만끽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를 돌아봤을 때 이 정도 규모의 낙천과 자기애를 누릴 수 있는 시기는 1년 중 아주 잠깐이다. 이 시기를 뭐라고 이름 붙이면 좋을까 잠시 고민 중이다. 인디언써머, 춘궁기, 보릿고개 같은 것만 연상되는데... 대저토마토가 나오는 시기와 겹친 적이 많고, 대저토마토 철은 아주 짧다는 점, 대저토마토가 가져다주는 행복은 대단히 값지다는 점에서 대젓고개라고 부르는 것은 어떨지, 궁색하지만 잠정적으로 정해두기로 한다...

대젓고개 시기에 나는 가장 바쁘고 게으르다. 해야(만)하는 일은 없고 시간은 넘친다. 잔고는 빠듯하지만 집 밖을 잘 나서지 않기 때문에 안빈낙도를 실천할 수 있다. 그리고 돈벌이는 안되지만 하고 싶은 일들이 삼십개 가량 있다. 그 목록을 대충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팟캐스트(곧 공개될 예정이며 열성적으로 준비 중에 있음)

-숨 쉴 때마다 누적되는 밀린 책 800여 권에게 죄책감 느끼기

-요괴협회의 다음 책을 위한 자료 조사

-요괴협회의 다음 책이 상상할 수록 너무나 대단해서 계속 상상하기

-취미 그림 그리기, 한번 시작하면 앉은 자리에서 뚝딱 세 작품 완성함

-꿈만화 연재 (기빨려서 일단 미루고 있음)

-재작년 가을부터 기획한 느슨한 잡지의 필진 모으기

-전례없이 위험하고 웃긴 시트콤 기획이 떠올랐는데 너무 시대를 앞서서 어떻게 처리할지 궁리 중에 있음

-동업자와의 서점 프로젝트 느슨하고 꾸준히 진행 중, 매우 고무적임

-작년부터 야금야금 메모 중인 여성서사 뭐시기 (뭐라고 이름 붙일지 아직 못 정함) 연구 대대적으로 정리해야함

-만화로 그리고 싶은 게 있는데 좀 잘 그려야돼서 인체 드로잉 공부해야함

-만화로 그리고 싶은 거(2) 있는데 공상과학이라서 레퍼런스로 봐야하는 작품이 너무 많음

-2월 계획 중 연날리기가 있어서 연도 만들어야함

-냉이 철 지나기 전에 봄나물 파스타 자주 해먹어야함

-냉이 철 지나기 전에 대전에 있는 냉이 닭도리탕 집에 출장가야함

-대저토마토 철 지나기 전에 부지런히 먹어야함 (최다대저의 최대행복 원칙)

-작년에 쓰던 소설 마저 완성하기

-운동 전성기 기록 찍고 있어서 이대로면 여름 전에 3대 1RM 200 찍을 예정이라 절대 소홀해지면 안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