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https://ko.wikipedia.org/wiki/유타주#몰몬교도들

후기성도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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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검 영

후기성도(몰몬교도)들은 유타의 첫 영구적 백인 정착자들이었다. 이 종교 단체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에 속하였다. 1830년 조셉 스미스 주니어가 뉴욕주 파이예트에서 이 교회를 설립하였다. 브리검 영은 1844년 스미스의 사망 후에 후기성도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후기성도들은 자신들이 가는 곳마다 거의 박해를 당하였다.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찾으면서 오하이오주미주리주와 일리노이주로 여행을 갔다. 1846년 영은 후기성도 무리와 교회를 이끌고 서부로 향하였다. 그들은 1847년 그레이트솔트 호 지방에 도달하여 영은 거기에 정착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도들을 위한 공동체들을 계획하였다.

후기성도들의 많은 단체들은 북중부 유타의 계곡들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계곡들을 관개하여 농장일을 생산적으로 만들었다. 1840년대 후반에 메뚜기의 무리들이 계곡들에 침입하여 정착자들의 수확물을 망치는 데 위협을 주었다. 그러나 그레이트솔트 호에서 온 갈매기들이 메뚜기들을 잡아 먹었다. 갈매기는 후에 주를 상징하는 새가 되었고, 솔트레이크시티에는 갈매기 기념비가 세워졌다. 정착자들의 수확물을 공격한 메뚜기의 일종은 이후 몰몬 메뚜기란 별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849년 후기성도들은 자신들의 영구 이주 기금을 설립하였다. 이 기금은 여행을 위하여 돈을 못 내던 많은 후기성도들을 유타로 데려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기금은 대략 40년 동안이나 운영되었고, 덴마크잉글랜드노르웨이스코틀랜드스웨덴과 웨일스에서 온 많은 이들을 포함한 대략 80,000명의 후기성도들을 유타로 데려왔다.

인디언들의 관계[편집]

후기성도와 인디언들 사이의 관계들은 처음에 평화로웠다. 그러나 어떤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대지를 가져간 정착자들을 분개하였다.

1853년이 시작되면서 워커라고 불리는 유트 족의 추장이 몇몇의 후기성도의 정착지들에 공격들을 이끌었다. 이 공격들은 워커 전쟁으로 알려졌다. 1854년 브리검 영은 공격들을 끝내는 데 워커를 설득시켰다. 몇년들 동안에 정착자들과 인디언들은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나 1865년 또다른 유트 족의 추장 블랙 호크가 후기성도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여기에 다른 종족들이 싸움에 개입하여 많은 후기성도들과 인디언들이 살해되었다. 정착자들은 1백만 달러 이상의 손해를 겪었고,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종족 대지들에 대한 권리를 잃었다. 블랙 호크와 그의 부하들은 1867년 싸움을 멈추고 1868년에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다른 인디언들은 1872년 후순까지 종종 출동하는 경우가 생겼다. 유트 족의 대부분은 유인타 분지에 있는 보호 구역에 정착하였다.

배노크 족과 쇼쇼니 족은 1863년 패트릭 E. 코너 아래의 미국 육군이 아이다호 남동부에서 일어난 베어강의 전투에서 그들을 물리칠 때까지 유타 북부와 아이다호 남부에서 급슥들을 일으켰다.

준주 시대와 주 지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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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프로몬터리에서 완공된 대륙횡단열차의 시스템

유타 지방은 1847년 몰몬교고들이 처음으로 도착하였을 때 멕시코에 속하였다. 당시 미국과 멕시코는 멕시코 전쟁에서 싸우고 있었다. 미국이 승리하고 멕시코로부터 유타 지방을 포함한 대지의 큰 지역을 얻었다.

1849년 몰몬교도들은 데저렛 주를 설립하였다. 그들은 브리검 영을 총독으로서와 함께 일시적 정부를 세웠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다른 정부 사무소들을 채웠다. 정착자들은 헌법을 채택하고 합중국에 편입되는 데 의문을 두었다. 그러나 의회는 미국에서 노예 제도의 의문에 격심한 토론에 교전하였다. 이 토론은 1850년 타협에서 결과를 가져왔다. 타협의 일부는 영을 첫 준주의 총독으로서 유타 준주를 설립하였다. 영토는 오늘날 유타 주의 동부와 서부로 멀리 넓혀졌다.

1849년과 1895년 사이에 유타 준주는 지속적으로 정식 주로 미합중국에 가입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의회는 후기성도들이 일부다처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이유로 유타준주를 정식 주로 편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 당시 30퍼센트에 가까운 유타 주민의 가족들은 일부다처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은 후기성도들이 유타 준주를 계속해서 통치하길 바라지 않았다. 1857년에 그는 조지아주의 앨프레드 커밍을 준주 지사로 임명하였다. 뷰캐넌 대통령은 임명을 집행하기 위해 연방군을 보냈다. 이러한 일단의 사건은 유타 전쟁, 몰몬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군인들은 유타를 향해 행렬하고 겨울에는 행군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 해 9월에는 후기성도의 단체와 그들과 동맹관계인 인디언들이 유타 영토를 지나가고 있는 아칸소주와 미주리주에서 온 대략 140명의 여행자들의 일행을 공격하였다. 이 여행자들이 유타주를 지나가는 동안 이들이 후기성도들에게 적대적이며 교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는 소문이 후기성도들 사이에서 퍼졌다. 이 공격에서는 아이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으며 이 사건은 매도우 산의 대학살로 지금까지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