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교통인가

오늘도 당신은 교통의 세계에 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설사 당신이 와병 중이거나, 휴일을 맞아 집에서 쥐죽은 듯 쉬고 있어도, 교통의 세계에서 유래한 흐름으로부터 당신이 벗어나 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생활을 도와주는 인류 물질문명의 수많은 산물들이 당신 집에서 스스로 생겨났을 리 없지 않은가. 당신의 마음속에 담긴 수많은 기억들 역시, 아마도 교통의 세계에서 유래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좋았든 싫었든, 행복했든 끔찍했든, 기억 속의 그곳으로 당신은 어딘가로부터 이동해 왔을 것이며, 또 각자의 기억을 안고 그곳에서 떠났을 것이다. 교통의 세계는 당신의 마음과 기억이 바로 그 자리에 있게 해 준 현실적인 조건이다.

물론 이런 말은 ‘당신의 의식은 대기의 산소 분압에 의존한다’거나 ‘생명은 빅뱅의 이러저러한 국면 덕분에 생겨난 입자들의 몇 가지 성질에 의존한다’ 같은 말과 그리 다르지 않게 들릴지 모른다. 모든 전문 분야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논리를 끌어댈 것이고, 삶 속에 자신의 분야가 다루는 대상들이 편재한다는 것 정도는 아주 평범한 정당화 논리에 불과하다. 대체 무슨 근거를 들어야, 시큰둥한 사람들에게 교통이 아주 중대한 의미가 있음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오스트리아 철학자이자 신학자 이반 일리치(1926~2002)의 논의를 꺼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는 한 사회의 에너지 사용량과 그 건전성에 대해 흥미로운 주장을 편다.[1] 1인당 에너지 사용량이 일정 수준 이하일 때,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이로 인해 자신의 가능성을 다 펼칠 수 없어 결국 ‘저개발 상태’가 이어진다는 데는 일리치 역시 공감한다. 하지만 이를 벗어나기 위해 개발을 계속하여 1인당 에너지 사용량이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하면, 에너지의 집약적 활용에서 나오는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점적 기술 관료 체계가 자라나게 되고, 이들의 편견과 이해관계가 사회의 나머지 부분을 노예로 만들 위험이 생기며, 결국 전 사회는 타락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론적 그림을 현실 세계에서 간명한 형태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가 바로 교통이라는 것이 일리치의 지적이다.

도보로 이동할 때, 사람들은 10km도 가기 전에 신체에 무리가 올 수 있다. 18세기 이전 인간에게 낯선 지역과의 교류와 먼 거리를 이동하는 체험은 아주 값비싼 것이었다. 19세기 이래의 철도,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후의 자동차와 항공 산업은 인간에게 이동의 자유를 가져다주었지만, 기술과 위험을 관리하는 거대한 관료 조직 역시 함께 만들어 냈다. 이들은 사회에게 자신들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강변했으며, 사람들은 이에 따라 사회의 물리적 · 심적 기반을 모두 바꾸어 나갔다. 교통의 개발은 사실상 모든 사람들의, 매일의 삶을 바꾸며, 도시나 그 속의 건축물 같은 물질문명의 다른 분야를 성형하는 데도 중대한 역할을 한다. 개인의 지리적 활동 범위, 그리고 그 물리적 기반을 모두 급속히 변화시켜 온 “교통은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개발의 목표들을 집약해서 보여 주는 모델”[2]이라는 일리치의 촌평은 전혀 과도하지 않다. 일리치의 논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박정희조차, 국민들에게 미래의 번영을 손에 잡히는 형태로 제시하기 위해 ‘마이카 시대’를 약속했다는 사실을 함께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일리치의 이론 가운데, 전문 기술 관료의 득세가 시민들을 노예로 전락시키고 말 것이며, 나아가 전 사회를 타락시킬 것이라는 평가적 주장은 사실 언뜻 인정하거나 이해하기 힘들다. 대체 기술 관료의 노예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판정할 것인가? 관료들 사이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시민들의 지성을 무시하는 지적은 아닌가? 에너지의 과도한 사용이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말은 더욱 엉뚱하게 느껴진다.[3] 하지만 사람과 물건의 이동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기계와 에너지를 집약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개발의 주요 초점이었고, 기술 관료를 등장시켰으며 그 역할 확대를 가속화했다는 서술적 주장은 오히려 부인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마찬가지로, 일리치의 평가적 주장 역시 조금 완화하여 이해한다면 누구라도 받아들일 만한 주장이 될 것이다. 인간은 여러 위험과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속도, 그리고 그 속도가 가져다주는 이득을 손에 쥐려고 하지만, 때로 이런 노력은 자기 파괴적일 수 있다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교통의 개발은 기회와 비용이, 그리고 파멸과 구원이 나란히 위치한 영역이다. 게다가 이렇게 건설된 망은 우연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치밀하고 섬세한 계획을 최선의 정보에 기반해 수립하더라도 미래의 모든 국면을 통제할 수는 없고, 다른 많은 시스템에서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인명 사고조차 완벽하게 피할 길은 없다. 더불어,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요청된 전 인류 에너지의 탈탄소화와 소비량 억제 계획(3부 8장 참조)은 일리치의 납득하기 어렵고 부분적으로 엉뚱해 보이던 평가적 주장이 수십 년 뒤 지구 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정량화된 결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교통이 오늘날 인류의 에너지 소모, 그리고 그로 인한 탄소 배출의 1/4을 점유하는 이상, 이동을 향한 인류의 열망을 어느 선에서 억제하지 않는다면 교통이 가져다주는 파멸은 운 나쁜 일부 사람들에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왜 철도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가

여기까지 동의한 사람이라도, 이 책의 주인공이 철도라는 걸 확인하면 잠시 멈칫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굳이 철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면,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육상 운송의 제왕으로 군림하면서 전통 사회의 타성을 무너뜨리고 공간 구조를 재편해 낸 그 힘과 위엄을 이야기하거나, 한국 철도와 유라시아 대륙망 사이의 재연결과 같이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역사적[4] 목표와 관련된 이야기를, 또는 한국망과 대륙망 사이의 연결로 인해 바뀌게 될 사람들 마음속의 인문 지리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볼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그리고 이번 세기 중후반을 달릴 근미래 철도에 대해, 또 서울이라는 특정한 거대도시 내부로부터 주변과 전국의 도시로 뻗어 있는 철도망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오늘의 철도가 서 있는 입지를 확인해 보면, 이런 선택은 패착처럼 보인다. 20세기 후반,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 걸쳐 지상에서는 자동차가, 공중에서는 항공기가 철도의 설 자리를 파괴해 왔다. 기술이나 서비스의 혁신은 물론, 이동의 힘에 기반해 일상을 벗어나는 즐거움 역시 대체로 자동차와 항공기에게 기대되는 역할이다. 일상인들에게 철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피곤한 경험만 안기는, 그래서 부를 쌓아 탈출해야 할 교통수단처럼 보일지 모른다. 또한 관료들에게 철도는 몇 가지 장점을 압도할 정도로 비싸고 복잡해서 조금만 잘못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워 부담만 끼치는 교통수단처럼 보일 것이다. 더욱이 자율 주행 자동차에 대한 약속이 교통의 미래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뒤흔든 덕분에, 철도는 자율 주행차 앞에서 그 강점과 입지를 대부분 잃을지도 모른다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교통의 세계에서 살아 있는 화석[5]처럼 보이는 철도에 초점을 두고 책을 쓰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들 의문에 가능한 한 상세히 답한 결과라고 이해해도 좋다. 서론에서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이 책 전체가 취할 논점과 방향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필요한 것은 왜 이 책이 특정 거대도시를 중심으로 뻗어 있는 철도망에 주목하고 그 의미를 성찰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최대한 간략한 답이다.

  1. 교통의 세계를 살펴보는 작업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이자 이 책을 가능하게 했던 출발점임을 앞서 밝힌 바 있다. 오늘의 철도는 그 속에 자체적으로 흥미로운 모순을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동차와 항공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교통망이 가져오는 비용을 절감하고 그 파멸적 효과를 완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다. 철도가 넘어야 할 모순보다는 그 강점에 먼저 초점을 맞춰 보자. 최소한의 면적으로 최대의 수송력을 제공할 수 있어 도심의 고밀도 개발과 고차 서비스 집적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나, 사람들의 일상 속 활동량을 늘려 건강 면에서 이득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자동차 · 항공에 비해 에너지 · 탄소 효율이 각기 10배, 5배 높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결정적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더 나은 교통과 도시를 꿈꾸는 전문가와 시민이라면 누구나 철도망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2. 철도가 이런 과업을 가장 폭넓은 범위에서, 최대한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는 지리적 단위는 바로 거대도시다. 물론 인구 1000만 명이 넘는 광역도시 권역에서만 철도망이 유용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시의 다른 긍정적 특징처럼, 철도 역시 높은 인구밀도로부터 적지 않은 긍정적 영향을 얻을 수 있다. 또한 거대도시는 다층적인 망 구성을 통해, 철도로 가장 폭넓은 속도 층위의 교통을 처리할 수 있는 지리 단위이기도 하다. 철도에 대한 이해는, 이 지리 단위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중요한 방법이다.
  3. 오늘날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철도는 정부의 개입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특히 이 개입은 막대한 건설 재정 투입으로 이뤄진다. 개인이나 기업의 책임과 비용 부담에 기반하는 승용차나 항공기와는 달리, 철도망은 이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회계약’이 없었다면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소멸했을 것이다. 정부 재정이 불충분한 제3세계 거대도시의 참담한 철도 현실은 본문에서 곧 확인할 수 있다. 반면 현재 한국이나 유럽에서 중앙정부 교통 재정의 40%는 바로 이 사회계약에 기반해 철도에게 지출되고 있다. 지금 체결되어 있는 이 계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또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검토하려면, 시간적으로는 오늘과 근미래의,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거대도시권 철도망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