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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제목답게 그림을 그리며 시작한다. 마리안느가 가르치는 학생의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그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인물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음에도, 학생이 마리안느에게서 느낀 슬픈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의 뒷모습은 왜 안쓰러워 보일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두 여인이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첫 만남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엄마로부터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의뢰받으며 시작된다. 하지만, 엘로이즈의 엄마는 그가 싫어하니 몰래 그림을 그릴 것을 요구한다. 초상화를 그리려면 대상을 알아가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마리안느는 수락한다. 결국, 명목상으로는 엘로이즈의 산책 메이트로서 지내게 된다. 그러나 이 제약은 두 사람에게 기회가 된다. 마리안느는 그림을 그려야 하기에 엘로이즈를 더욱 찬찬히 바라보며, 밤에도 그를 떠올리면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엘로이즈를 바라보고, 탐구하고, 어루만지는 듯 움직이는 붓을 통해 감정은 캔버스 위로 번져나간다. 하지만 마리안느가 그리는 그림은 엘로이즈의 남편이 될 사람에게 보내는 초상화다. 당시, 여성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준 남성과 결혼을 해야만 했다. 만나보지도 않고 그저 초상화를 통해 어떻게 생겼는지만 파악한 후 부부가 되었다. 마리안느는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엘로이즈에게 빠졌지만 결혼을 멈추게 할 수도, 그림을 그만 그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중매 초상화를 계속 그려나간다.

엘로이즈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화가들을 모조리 돌려보내왔다. 집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산책을 가고 책을 읽는 것만이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다. 억압적인 상황에서 엘로이즈는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봤다. 그러다 마리안느를 만나게 되었다. 마리안느와 걷고 이야기를 나누며, 엘로이즈의 세상은 책이 아니라 마리안느로 조금씩 확장된다. 그렇게 엘로이즈 역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 또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대신, 자신의 몸을 허락하듯 마리안느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 말한다. 당신의 앞에 가만히 앉아 있을 테니, 남은 순간만큼은 우리 서로를 바라보고 있자고 얘기하듯.

초상화는 더 이상 결혼을 위해서 그리는 그림이 아니게 된다. 두 사람이 집안에서도 자유롭게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만드는 장치이자, 시선으로 나누는 대화로 바뀐다. 마리안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엘로이즈를 바라보고,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자신을 관찰하는 모습을 본다. 아주 긴 시간, 그들은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다. 초상화가 완성되면 헤어져야 한다는 걸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찬찬히, 소중하게 기억 속에 담는다. 초상화는 결국 완성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엘로이즈를 그리는 마리안느의 시선, 그리고 두 여인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을 통해 관객들 또한 그들을 쓰다듬어보게 만든다. 아마도 누군가 이 영화를 보는 나를 그리게 된다면, 그 작품 또한 먹먹함이 느껴질 것이다. 어느새 영화를 보는 내 눈에도 푸른색의 필터가 씌워졌으니까. 그러나 이 필터는 영화가 끝나도 계속된다. 푸른빛의 슬픈 세상은 무지개와 여인들의 모습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시대극이지만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영화 속 동성애자와 여성들이 겪는 수많은 일들은 여전히 그대로다. 영화는 지워질 수 없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와 함께 우리는 아무리 불태워도 재가 되지 않을 여성이 되었다. 그러니 타오르는 불꽃으로 푸른빛을 없애보자. 무지개가 다시 뜨고 여성들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