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주 극작가∙연출가
#희곡쓰기 #목디스크 #현침살 #자전적이야기 #리클라이너 #펜과칼 #불편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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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에 연습실에 있던 리클라이너 의자를 작은 경차에 꾸역꾸역 실어 집으로 옮겨왔습니다. 제자리 없이 떠돌던 책을 담을 책장과 노트북 거치대, 사무용 베개도 새로 들였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나쁜 자세로 글을 쓰던 습관 끝에 목디스크가 탈출해서 팔을 들지 못하는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쓰는 나’를 위한 친절한 공간을 마련한 셈입니다. 몸이 한결 편해지자, ‘왜 진작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자책하면서, 그동안 스스로에게 얼마나 불친절했는지 깨달았습니다. 희곡을 쓰는 일이 장시간의 육체노동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삐딱한 자세로 쌓여온 검열의 피로가 경추 5번과 6번 사이의 통증으로 고스란히 남아버렸습니다.
봄에 발표한 두산아트랩 낭독공연 <8월, 카메군과 모토야스 강을 건넌 기록>에서 유년기의 집단 따돌림 이야기를 희곡으로 쓰며, 저를 괴롭혔던 가해 학생이 관객으로 올 확률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극장에서 마주친다면, ‘웃으며 인사를 건넬 수 있을까? 아니면 모른 척하며 냅다 화장실 칸으로 들어갈까?’ 혼자 상상했습니다. 쓰고 무대를 지켜볼 용기는 있지만, 삶에서 만날 용기는 아직 없었나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해자이자 피해자의 경험을 동시에 고백한 관객의 물음 앞에서, 창작자와 관객으로서 작품을 나누었다는 이유만으로 선뜻 그분의 불편함을 위로할 수 없었던 속마음을 고백합니다. 처음 희곡을 무대에 올렸을 때는 제 안에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이 반가워 스스럼이 없었는데, 요즘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또 다른 사려와 용기가 필요해졌습니다. 그만큼 책상에서 보낸 시간이 경추 사이사이를 짓눌렀나 봅니다. 건강하지 못한 화자로 관객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일상의 용기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그저 쓰는 것은 비겁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쓰기 위해 꺼냈던 용기가 극장과 극장 밖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더 큰 대담함이 필요했습니다. 그 힘은 동료들로부터 얻기도 합니다. 텍스트를 매개로 모인 배우들과 각자의 경험을 내어놓고 함께 공감하며 대화의 상대를 구체적으로 그리는 과정을 함께하면서 관객을 만날 이유가 명확해지기도 합니다. 서로의 발화된 상처가 포용 되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쓰기가 삶의 용기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계속 극장 문을 두드릴 것 같습니다.
일본에 다녀오고 왕따는 심해졌다. 민휘는 우리 반 일진이었다. 일본 학원 만화에 나오는 일진회 옷을 따라 입었다. 다마고치 게임기를 가져간 날, 내 별명은 쪽바리가 되었다. 연극 <8월, 카메군과 모토야스 강을 건넌 기록> 中
예전에는 ‘그런 얘기를 부러 뭐 하려고 해’라고 말하던 엄마가 요즘은 ‘고생 많았다’라고 말해줍니다. 문득 엄마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명리학에서 제가 현침살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풀이였는데, 뾰족한 바늘이나 펜, 칼과 같은 도구를 쓰는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돌잡이에서도 잡았던 연필이 칼의 의미도 된다고 생각하니 웃음과 함께 깊은 깨달음이 따라왔습니다. 펜이 칼이 되어 상처를 내고 아픈 구석을 후벼도 희곡을 통해 타인과 연결되고 또 무대의 언어로 옮겨지며 변화를 겪는 과정이 오히려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칼을 갈던 시간이 목에 축적되어 스스로에게 불친절한 작업이 되었지만, 앞으로는 작가와 타인 모두를 다치게 할 수 있는 이 도구가 회복을 위한 첨예한 칼끝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기꺼이 감내할 만한 ‘불편한 쓰기’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전에 고장 난 마우스와 블루투스 키보드를 치우고, 새것을 주문해야겠습니다. 자꾸만 모니터를 향해 구부정해지는 경추를 위해, 불편에 용기 내기 위한 건강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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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주 (극작가∙연출가)
DAC Artist 극단 생존자프로젝트 대표
독립적인 ‘연극 쓰기’ 중이다. 내 안의 상처와 폭력의 흔적을 발견하고, 나의 역사가 지금 시대에 어떤 ‘말 걸기’가 될 수 있을지 탐구한다.
작∙연출 <맆소녀(The Silent One)><8월, 카메군과 모토야스 강을 건넌 기록> <공동창작 실패 다큐멘터리: 생존자프로젝트는 생존할 수 있을까><박테리아 이분법> <면목동: 기억에 관한 다큐멘터리><공기없는세계><면목동> 외
수상 2025 제61회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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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주(극작가∙연출가)와 함께하는 아트 클래스
쓰기 – 희곡 쓰기, 만나기: 자전적 이야기로 시작하는 ‘시대 잇기’
10.24(금), 10.29(수), 10.31(금) 오후 7시-9시 두산아트센터 Studio DAC 무료(1인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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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DAC]Studio DAC: 아트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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