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하나 둘 곳 없는 작은 자취방에는 두 명이 겨우 앉을 수 있는 가죽 소파와 낡은 텔레비전만이 놓여 있었지만, 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익숙하게 커튼을 치고 소파에 나란히 몸을 누인다. VHS가 아직 보급되지 못했던 이 시기에 집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매주 일요일 특정 채널에서 정기적인 시간에 송출되는 영화를 시청하는 것뿐이었다. 원하는 작품을 골라볼 수 없다는 건 아쉬웠으나, 그럼에도 이 비좁고 소중한 자취방은 매주 같은 시간에 오로지 두 유학생만을 위한 영화관이 된다. 맞붙은 어깨로부터 전해지는 당신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그들은 조용히 인트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광고가 흘러가고, 이윽고 나른한 음악과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텔레비전의 화면만이 색채를 품고 있는 공간. 빨강, 파랑, 초록의 세 가지 단색은 눈앞에서 모든 존재를 구현한다. 누군가의 시야를 구현한다. 영화라는 건 명백하게 타인의 삶을 관음하는 체험이었다. 그러니 관객이 그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 관객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건 감독, 각본, 연기의 영역이었다. 아마추어 감독과 아마추어 각본가는 각자의 시점에서 같은 영화를 해부하기 시작한다. 함께 더 나은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누아르는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당신을 어느 순간 흘긋 바라보았다. 빨강, 파랑, 초록의 세 가지 단색이 직조하는 빛의 조각들이 당신의 코끝과 뺨, 두 눈을 물들이고 있었다.

RGB

“전반적인 흐름은 좋았는데, 감정선이 아쉬웠지.”

차가운 비와 함께 피부를 스치는 바람에 누아르는 코를 가볍게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아준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좀 더 느껴졌으면 좋았을 거야. 전개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건 사랑만 한 것이 없는데, 너무 많은 감정을 그려내다 보니 이야기는 중심을 잃고 주인공만 혼자 결말로 질주하고 만다. 타당한 비평이었기에 테레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좀 더 몸을 기울인다.

어두운 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길거리에서 그들은 우산 하나를 나눠 쓰며 테레사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시 데려다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하지만 자연스럽게 우산을 꺼내 함께 방을 나서 주었던 당신의 배려에 다른 말을 얹을 수는 없다. 신호등의 조명이 빗물이 만들어낸 웅덩이에 비쳐 은은하게 거리를 밝힌다. 빨강과 초록. 점멸하는 노란 빛. 뚜렷한 단색의 조합 앞에서 테레사는 함께 보았던 영화의 내용을 복기한다.

“…사랑만큼 각자의 기준이 다른 감정은 없으니까, 모두를 똑같이 설득하기는 어려울지도 몰라.”

사람은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면 가장 먼저 사랑이란 감정을 배운다. 어머니와 맞닿는 피부, 따스한 체온, 입안으로 들어오는 음식들, 어깨 위에 덮이는 담요와 같은 형태로. 그리고 조금 더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아이는 더욱 다양한 형태의 사랑과 마주하게 되지. 그것의 경험은 각자 다를 것이기에 당신이 사랑이라 생각하는 걸 타인이 사랑이라 생각하지 못하게 되어도 어쩔 수가 없다. 누아르는 아직 초록불이 켜지지 않은 신호등의 앞에 서서 조용히 말을 이어가고 있는 테레사를 바라보았다.

예를 들면, 이렇게 하나의 우산을 나눠 쓰는 것. 나의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 나의 어깨가 젖지 않도록 손으로 감싸주고 있는 것. 함께 본 영화의 감상을 나누는 것들. 그 하나하나를 사랑으로 여길지 혹은 여기지 않을지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영화가 사랑을 설득하는 건 어려운 과제일 거야. 어쩌면 영화의 감독은 아준의 모든 행동에 사랑을 충분히 담아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녀의 말이 마무리될 즈음 신호등의 불빛이 바뀐다. 그러나 누아르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고, 이에 테레사가 고개를 들면 그녀가 자신을 곧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