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생각난 건데 말이야. 우리는 둘 다 꿈을 꿔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네.
동결 건조 야채가 담긴 봉지를 손에 쥐고 가볍게 흔들던 연구원이 뜬금없는 화두를 던지자 그 맞은편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연구원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자연스레 전기 포트를 건넨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작업들은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곤 하니, 당신 나름대로 가벼운 화제를 던져본 걸지도 몰라. 그러한 마음을 존중하기 위해 포인터는 뜨거운 물을 따라내고 있는 히사베스의 가설을 긍정한다.
꿈이란 건 뇌가 하루의 기억을 재정립하는 생리 현상이지. 당신의 경우 그것에 영향을 주는 형제들이 너무 많기에, 그리고 나의 경우 그러한 ‘생리 현상’이 필요하지 않기에 우리는 자신만의 꿈을 꿔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데워진 물에 의해 조금씩 풀어지는 면을 휘저으며 포인터는 가만히 독백을 이어 나간다. 하지만 내가 꾸게 될 악몽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꿈인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아. 후회하는 마음을 짊어지기 위해 장기 보존 데이터로 남겨두었던 그날의 기억. 차가운 서류 속 당신들의 휘갈긴 서명들. 불안한 예감이 현실이 되는 시뮬레이션.
그러한 것들을 고려해 보면, 꿈을 꾸지 않아서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차가운 금속 외피를 가진 연구원은 생각했다.
Lucid
피부에 맞닿고 있는 서늘하고 기분 좋은 온도를 느끼며 히사베스는 눈꺼풀 위를 덮고 있는 졸음을 천천히 밀어낸다. 작게 웅웅거리는 백색 소음과 침대를 데우는 햇볕. 어젯밤의 여파로 몸의 이곳저곳이 아직 욱신거리긴 하지만 그것이 힘들거나 불쾌하진 않다. 굳이 소감을 남긴다면, 꽤나 배려를 받아서 편안하고 기분 좋았지. 체온까지 조절해 주고 있는 당신 때문에 오히려 잠에서 깨어나기가 힘들었다. 가물거리는 시야를 걷어내고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니 자신을 품에 안은 채 잠들어 있는 연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꿈은 꾸지 않더라도 잠은 자고 있다고 했던가. 저전력 모드에 가까운 그녀에게서는 느릿하고 규칙적인 기계음이 마치 심장 박동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기 위해 품 안으로 파고들면, 신호를 잘못 이해한 당신이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는다.
“어…내가 깨웠나?” “아니, 아까부터 일어나 있었어.”
그럼 딱히 미안하진 않네.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으며 히사베스는 파고들었던 품속에서 고개를 들어 연인의 얼굴과 마주한다. 그제야 드러난 당신의 유리 동공에 자신의 모습이 선명히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허리 위에 손이 얹어진다. 반복된 경험으로 익숙했던 두 번째 신호를, 이번에는 제대로 이해한 그녀가 조심스럽게 몸을 기울여 입을 맞춰 온다.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는 감각은 나른해진 이성을 천천히 어루만진다. 자연스레 포인터의 목에 팔을 둘러오던 히사베스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일련의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살짝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