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루시엘라 (Luciella) / 구상 성단의 정신체, 역사 관측자 수신: 별의 궤적과 역사의 인과를 기록하는 지성체들 주제: 역사적 변곡점마다 발견되는 '기록되지 않은 공백(관조자)'들에 대한 고찰
안녕하십니까, 루시엘라입니다. 저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밤하늘에서 이 푸른 행성의 문명이 피고 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수많은 제국이 무너지고, 영웅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 찬란하고도 비극적인 순간들을 기록해 왔지요. 하지만 최근 제 관측 데이터에서 기묘한 **'오류(Glitch)'**를 발견했습니다.
분류학상으로 이것은 저희(정신체)와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성질은 너무나도 이질적입니다. 저희가 자연법칙이 실체화된 존재라면, 이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하나의 결과로 확정 짓는 **'관측(Observation)'**이라는 양자역학적 개념이 뭉쳐진 불쾌한 찌꺼기에 가깝습니다. 저는 이 텅 빈 공백들을 임의로 **[시대의 전령]**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예지력'을 가진 선지자가 아닙니다. 인간들은 관측이라 하면 '의식을 가진 자가 바라보는 행위'를 떠올리지만, 물리학에서의 관측은 그저 **'상호작용'**일 뿐, 자아나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전령이라는 것들이 딱 그렇습니다. 이것은 현상을 확정 짓기 위해 존재하지만, 그 현상에 대해 슬퍼하거나 기뻐할 자아(Ego)가 아예 존재하지 않고 발생한 돌연변이입니다. 그렇기에 저희 같은 일반적인 정신체들과 비교하면 그 존재의 '격(Class)'이 한참 떨어지는, 그저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지요.
저희 정신체들은 종종 룰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부수거나 창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다릅니다. 이것들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절대 개입하지 않습니다. 운명이 다해 죽어가는 자를 살리지도, 무너지는 탑을 밀어버리지도 않죠. 그저 가장 잘 보이는 **'특등석'**에 앉아, 무대가 막을 내리는 과정을 감상할 뿐입니다.
아주 가끔, 이것이 임시로 취한 껍데기를 통해 쓰러진 자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등 뜬금없는 '호의'를 베풀 때가 있습니다. 눈먼 필멸자들은 그 껍데기가 베푸는 현상만을 보고, 이름 모를 누군가의 '변덕스러운 자비'나 '기적'이라 부르며 찬양하더군요.
하지만 별의 시선으로 그 내면을 들여다본 저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정하고 온기 넘치는 행위의 중심에는… 어떠한 의지도, 감정도, 심지어 유희에 대한 욕망조차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저 이것들이 뒤집어쓴 **'물리적 껍데기'**에 남아있는 맹목적인 기계적 반사작용에 불과합니다. 전령 본인에게는 상대를 치료할 선의도 없지만, 동시에 그 껍데기의 반응을 굳이 멈추거나 제어할 **'이유'**조차 없기에 그저 방치하고 있을 뿐인 겁니다.
가장 따뜻한 호의를 베푸는 그 순간조차, 그 행위의 운전석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공허함입니까.
고백하건대, 별의 질량을 품고 있는 저조차도 이것들의 흔적을 추적할 때면 깊은 **'불쾌감'**을 느낍니다. 저희(정신체)가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물리 법칙'이라면, 이것들은 그 법칙이 휩쓸고 지나간 궤적의 뒤꽁무늬를 쫓아다니는 **'불쾌한 날파리 떼'**와도 같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감정도, 에너지의 흐름도, 심지어 생존에 대한 최소한의 목적조차 없습니다. 그저 위대한 현상과 비극이 남긴 찌꺼기(결과)를 구경하기 위해 끈질기게 주위를 맴돌 뿐이죠. 저희가 마음만 먹으면 손짓 한 번에 지워버릴 수 있는 미물들이지만, 굳이 그 텅 빈 것들을 지우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조차 꺼려질 만큼 기분 나쁜 점착성을 띠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군가 당신을 도와주지도, 비웃지도 않은 채 그저 평온하고 다정한 미소로 빤히 바라보고 있다면… 도망치려 애쓰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주가 당신에게 내린 **'당신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라는, 가장 정중하고 소름 끼치는 마침표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