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주제: 커먼즈, 수행성, 현상학적 관점, 신체

<aside> 🧭 현대 도시의 불확실한 세상에서 우리는 쉽게 길을 잃고 헤맨다. 방랑하는 자는 한껏 들떠있거나 고독과 분노에 찬 상태로 사라질 도시의 모습과 이야기와 사물을 헤집고 다니며 기록한다. 어쩌면 방랑자의 기록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갈애이자 욕망에 대한 출몰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이번 자습소에서는 현장 조사하는 것과 (일부러) 길을 잃는 것에 대해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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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에 날선 바람이 불던 2010년 3월 어느 날에 서울 세종대로사거리 교통섬에 서서 보행신호를 기다렸다. 팔차선 도로를 지나는 수많은 자동차가 멈추던 때 횡단보도를 향해 인파와 함께 미끄러지듯 따라 들어갔다. 광화문 대로를 지나칠 때마다 나는 막 상경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몇몇 빌딩에 붙어있는 거대한 전광판에 시선을 뺏기고 차량 배기음과 매연, 농성 현장과의 마주침에 정신이 번쩍 들다가도 이내 빠져버렸다. 서울 도심을 걷노라면 매끈한 도로와 빌딩에 압도당하기도 하지만 도로를 점유했던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여름과 가을, 시청과 종로 일대 거리를 점유한 퀴어 행진과 기후정의를 외치는 대열에 들어섰다. 소나기가 쏟아지던 때에 퀴어 행진에 혐오하는 행렬을 비집고 나아갔으며, 뜨겁게 내리쬐는 가을볕에 아스팔트 도로에 앉거나 드러누웠다. 도로 위를 점유하는 그 잠깐 사이에 대항하는 힘이 생기는 듯했다. 기쁘고도 처절하기도 한 일시적인 집합 행동은 기존 체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걸까. 단지 퍼포먼스에 그치는 걸까. 이런 움직임에 공명하면서도 나는 시스젠더 이성애자로서 이성애 규범성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했고, 기후 악당이라 불리는 기업의 공산품과 함께 (반)생태적 삶을 산다. 사실 나는 이런 집합 행동에 합류하면서 삶에 대한 위기감와 수치심, 부채감을 조금은 덜어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글을 비롯해 일상세계를 되찾는 방식, 대안적,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성찰로서 도시를 체험하고 기록한 작업을 소개한다. 그동안 내가 공들이거나 애써 외면하거나 흘겨보던 서울이라는 도시의 장소로부터 출발해 최근에 연구와 예술 작업을 잇는 여정을 담는다. 여러 지역을 다니며 연구-예술-실천을 경유하는 과정에서 나는 줄곧 길을 잃는다. 사실상 “어떻게 길을 잃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고려해 볼 수 있는데, 페미니스트 비평가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A Field Guide To Getting Lost)>는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To the Lighthouse)>를 인용해 “길 잃기는 정체성의 문제, 열렬한 욕망의 문제, 다급한 필요의 문제”로의 연결로 설명한다. 게다가 길 잃기는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뿐 아니라 “길 잃은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에서는 이상한 것들이 발견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길 잃기는 자신의 존재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특정 방향을 향한 길 위에 우리가 길을 잃는 것은 자신과 마주한 환경, 사물, 사람과의 관계를 다시금 때론 낯설게 나타내는 일이다. 반대로,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아는 세상에 한정돼 붙들려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현재의 도시가 과거를 지운 채 ‘미래 도시’라는 어떤 발전상(想)에 붙들려 끌려가는 점을 지적하며, 상실했다는 감각마저 잃어버린 도시의 이야기를 살핀다.

“잃는다는 것에는 사실 전혀 다른 두 의미가 있다. 사물을 잃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차츰 사라지는 일이지만,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 길을 잃을 때는 다르다. 그때는 세상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 커진 셈이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통제력을 잃는다는 점은 같다. 우리가 시간을 따라 흘러가면서 장갑을, 우산을, 렌치를, 책을, 친구를, 집을, 이름을 차례차례 흘리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기차에 역방향으로 앉아 밖을 바라보면 그런 풍경이 보일 것이다. 반면 앞을 보며 달려갈 때는 도착의 순간, 실현의 순간, 발견의 순간을 끊임없이 만난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뒤로 날리고,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맞는다. 이처럼 앞으로 돌진하는 경험에서는 물질적인 것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간다. 뱀이 탈피할 때 벗는 허물처럼 우리에게서 벗겨져 나간다.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물론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감각마저 잃는 것이다. 그런데 상실의 감각이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이자 우리가 현재에 길을 찾도록 도와줄 단서들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익혀야 할 기술은 과거를 잊는 기술이 아니라 손에서 놓아주는 기술이다.

<땅과 길의 상실을 이야기하는 방식>

(1) 상실한 장소에 대한 기억

광화문 교보생명 건물 뒤편에 있는 종로 청진동 일대를 걷다보면 고층건물 사이에 ‘피맛골’이라는 표식이 눈에 띄게 도드라진다. ‘피맛골’은 조선시대 서민이 고관의 말을 피해 다닌다(피마(避馬))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종로의 뒷골목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은 보부상과 상인을 비롯한 서민의 주된 통행로이자 거주지로 발달했으며 과거의 경관이나 흔적을 통해 오늘날까지 해장국, 생선구이, 막걸리, 빈대떡 등의 명소로 기억되곤 하였다(전종한, 2009: 780). 하지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피맛골은 “생선구이 냄새가 나지도 않고 그런 냄새를 피울 수 없도록 규제(전종한, 2009: 793)”된 현대식 식당가로 변모하였다. 1979년 청진동 일대가 도시환경정비사업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최근까지도 철거 재개발이나 수복 재개발로 수년간 개발되고 있다(이범훈, 김진호, 2021: 488). 이에 따라 피맛골은 가로의 선형만 남긴 채 특유한 분위기와 주변 상가의 규모와 형태 등은 찾아보기 어렵다(이범훈, 김진호, 2021: 494). 맛과 냄새를 잃은 피맛골은 이제 여느 복합쇼핑센터의 상가와 다를 바 없는 장소로 남아있다.

재개발 현장에는 사라진 장소뿐 아니라 이에 맞서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재개발 사업 탓에 쫓겨나고 밀려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이라는 책에 담겨있다. 빈곤사회연대 활동가인 저자는 서울 곳곳에 발생한 개발과 투쟁의 역사를 비롯해 철거민, 노점상, 홈리스, 쪽방 주민, 장애인 등 연대하면서 불평등한 사회를 고발한다. 2010년 막 활동가로서 발돋움하던 시기에 저자는 서대문과 독립문에 있던 골목길에 김치찜과 도가니탕, 노포 등을 기억하며, 지금의 대단지 아파트로 변모한 생경한 모습에 낯설어한다(김윤영, 2022: 107). “걸으면서 봐도 뚜렷한 이 변화는 이화여대에서 넘어오는 현저고가차도를 타고 종로로 넘어갈 때 더욱 스펙터클하게 느껴지는데, 고가도로 양쪽으로 펼쳐진 아파트를 따라 시야도 덩달아 높아지기 때문이다(107).” 20세기 초 근대도시의 스펙터클을 관망하던 파리의 어느 산책자와 달리, 오늘날 급변하는 서울을 바라보는 활동가는 도시의 조각을 찾아 감상에 젖지 않고 “빈곤의 덫을 해체”하는데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