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들어선 미술관, 꼭대기부터 한 층씩 돌아 내려오는 중이었습니다. 2층 코너를 돌아서자 하얀 가벽이 제 앞을 떡 하니 막아섭니다. 그리고 그 벽을 메우고 있는 그림, 얼추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는 되는 큰 그림. 저는 그 앞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단순하지만 힘 있는 그림체와 노랗고 빨갛고 파란 선명한 색깔. 검은 테두리 안을 크레용으로 거칠게 메운 듯한 붓 칠이 그려낸 건 사람과 사람, 야수처럼 변한 사람들, 상처 입어 고통받는 사람들입니다. 하얀 눈 흰자에 검은 눈동자, 그림 가득히 보이는 건 하얗고 뾰족한 이빨과 발톱 같은 손입니다. 서로를 물어 피가 흐르고, 물린 사람들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릅니다. 물린 상처에서, 벌린 입에서, 휘둥그레 뜬 눈에서 핏줄기가 흐릅니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지만 그림에 그려진 절규와 고통이 그림 속에서 절절하게 새어 나옵니다. 나의 가족과 이웃이, 나와 같은 모습의 사람들이 갑자기 아귀로 변한 것 같습니다. 나를 물어뜯는 것으로 모자라, 무언가 더 없을까 둘러보고 다음은 누구를 물을까 둘러보는 시선들 앞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그림. 그렇지만 고통에 찬 얼굴과 몸짓에 사로잡혀 그림 앞에서 시선을 돌릴 수도, 발걸음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죠, 제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다는 걸 말입니다.
화창한 토요일의 이른 오후, 풍선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미술관에 들렀을 뿐인데, 그림 앞에서 개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제 모습이 어이없고 창피합니다. 사람들이 혹시라도 볼까, 점퍼의 소매 끝을 길게 당겨 얼른 눈물을 훔쳤습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아무 일 도 없었다는 듯, 교양 있는 사람인 양 그림의 작가와 제목을 냉큼 훔쳐봅니다. Malangatana Ngwenya (말랑가타나 뉴웨냐), 발음할 엄두도 나지 않고 철자를 정확히 기억하려면 백 년은 족히 걸릴 것 같은 화가의 이름. 그림의 제목은 세상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제목, ‘무제(untitled)’입니다.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기 전, 정확히 몇 년 전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머릿속에 강렬히 박혀있는 '저를 울린 첫 그림’이 요즘 들어 자꾸 떠오릅니다. 다행히도 그 그림, 그때 그림을 보았던 영국 런던의 테이트 현대 미술관(Tate Modern London) 소유한 그림이어서 구글 검색을 통해 바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말랑가타나는 20세기 후반 아프리카 화가의 대표로 꼽는 유명한 화가입니다. 말랑가타나는 1936년 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모잠비크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습니다. 피 끓는 청년 말랑가타나는 1964년 모잠비크 해방 운동 FRELIMO에 합류했고 같은 해, 포르투갈 비밀경찰에 구금되어 18개월 동안 투옥하였습니다. 이 그림이 1967년에 그려졌으니 석방되고 얼마 있다 그린 겁니다. 그의 조국 모잠비크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위해 고금 분투하는 동안 견뎌야 했던 폭력과 야만성, 평범한 일반인의 고민과 투쟁을 그려내었다고 평가받습니다. 참고로 모잠비크는 1975년 포르투갈에서 독립하여 '모잠비크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왜 이 그림에 그렇게 끌렸는지 이제서야 이해가 갑니다. 화가의 배경도 그림의 내용도 몰랐지만 그림이 제게 얘기하는 걸 들었던 겁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잔인함과 폭력성, 상처 입고 상처 주며 사람이 아귀가 되는 그림을 보며 그렇지 않아도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여 척박했던 제 마음이 이해받는 듯, 그렇게 큰 울림이 되었나 봅니다. 화가의 치열한 고민과 삶이 녹아난 그림의 힘은 이렇게도 강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