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의 눈물

본문: 창세기 27:36-41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울기도 많이 울고 슬퍼하기도 많이 슬퍼합니다. 눈물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기뻐도 울고, 아파도 울고, 슬퍼도 울고, 그 밖의 여러 이유로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나이가 들다 보면 눈물이 많아지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눈물이 마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눈물은 우리 일생에서 떼어낼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한 부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눈물의 종류 중에 악어의 눈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악어가 먹이를 잡아먹을 때 먹이를 눈앞에 두고 눈물을 흘립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악어가 상당히 인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슬픔을 표현하고, 살기 위해서 너를 먹지만 그래도 너를 위해서 애도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악어를 비인간적이지 않고 상당히 괜찮은 동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악어의 인간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메커니즘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악어는 입을 크게 벌리면 눈물샘이 자극받아서 눈물이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생겨 먹은 것입니다. 눈물이 흘러내려서 그 눈물이 입으로 들어가고, 입안에 수분을 보충하면 먹이를 삼키기가 용이해집니다. 그래서 악어는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이고, 과거에 악어를 관찰하던 사람은 악어의 눈물을 위선자의 그것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관용적으로 악어의 눈물을 위선의 눈물, 거짓의 눈물, 이중적인 눈물이라고 부릅니다.

청개구리의 눈물도 있습니다. 개구리가 엄마 말을 정말 안 들었습니다. 엄마가 이렇게 하라고 하면 저렇게 하고, 늘 반대로 행동합니다. 엄마가 아들 개구리 때문에 너무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 유언을 남깁니다. "너 내가 죽거든 나를 산에다 묻지 말고 반드시 강가에다 묻으라." 그렇게 해야 아들이 반대로 산에다 묻어줄 거라고 생각하며 단단히 일렀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갑자기 회심했습니다. 내가 엄마 살았을 때는 반대로 했지만 이제 한 번은 엄마 말을 들어야지 하며, 그만 엄마 묘를 강가에 쓰고 말았습니다. 큰 비가 내리는 날이면 청개구리가 엄마 묘가 떠내려갈까 봐 울었다고 합니다. 그 눈물은 회한의 눈물이고 후회의 눈물입니다.

분노의 눈물도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분노해서 흘리는 눈물이 가장 짜다고 합니다. 사람이 화가 나면 교감 신경이 흥분해서 눈동자가 커집니다. 그리고 눈의 깜빡임이 느려집니다. 눈을 크게 뜨고 눈을 깜빡이지 않으면 눈에 있는 수분이 증발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눈물이 짜집니다.

우리가 살면서 분노의 눈물도 흘리고, 위선의 눈물도 흘리고, 후회의 눈물도 다 흘려봤을 것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각종 눈물을 우리는 다 흘리고 삽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 말씀 본문에도 눈물이 나옵니다. 에서가 흘린 눈물입니다. 에서의 눈물은 이 중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요? 에서가 흘리는 눈물은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눈물일까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어떤 눈물을 원하시는지, 에서의 눈물은 과연 합당한 눈물이었는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남 탓하는 자의 비극

아버지 이삭은 야곱을 축복하고 말았습니다. 자기도 에서인 줄 알았는데 야곱이었습니다. 에서는 산에서 짐승을 잡아 와서 사냥한 고기를 가지고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에게 가지고 옵니다. 아버지가 이미 축복이 끝났다고 말합니다. 에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동생이 복을 받고 가버린 후였습니다. 이제 화가 났습니다.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길길이 날뜁니다.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창 27:36)

에서가 한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나를 속인 것이 이미 두 번째입니다. 처음에는 장자권을 빼앗았고, 이번에는 내 복을 빼앗았습니다. 에서의 이 말이 과연 진실입니까? 한번 따져봅시다.

먼저 장자권에 대해서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에서가 산에서 짐승을 잡다가 사냥하다가 배가 너무너무 고팠습니다. 집에 들어오니 마침 동생 야곱이 팥죽을 쑤었습니다. 팥죽 냄새가 온 집에 진동합니다. 팥죽 한 그릇을 달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팥죽을 줄 테니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라. 에서는 망설이지도 않습니다. 두 번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시장하여 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며 그냥 팔아버렸습니다.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상황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이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더라."

장자의 명분을 야곱이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입으로, 자기 손으로 그냥 팔아치워버렸습니다. 야곱이 힘이 세서 형과 싸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상대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장자의 명분을 자기 손으로, 자기 입으로 그냥 팔아치운 것은 에서 자신이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기억에 오류가 있든지, 자기중심적이든지, 이 사람은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야곱이 내 복을 빼앗았다는 말입니다. 여기 이 '내 복'이라는 말 속에는 그의 깊은 교만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언제부터 자기 복이었습니까? 그것이 정말 자기 복이었습니까? 그 복이 원래부터 자기 것이었습니까? 사냥한 고기를 가지고 오면 아버지가 너를 마음껏 축복하겠다 한 것, 이것은 공로주의에 휩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맏아들이기 때문에 날 때부터 복 받은 존재라고 생각한 것, 이것은 혈통주의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받을 사람을 찾아보시다가 복 받을 자격이 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것이 원래부터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복을 빼앗겼다고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복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장남답게 행동한 적이 없었습니다. 부모에게는 근심과 걱정거리가 되었고, 동생에게는 짐덩어리였습니다. 복 받을 짓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 복이 자기 복입니까?

이 두 가지를 보더라도 이 사람은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남 탓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닥치면, 자기 인생에 큰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수렴됩니다. 첫 번째 사람은 무조건 남 탓하고 봅니다. 환경을 탓합니다. 주변 이웃을 탓합니다. 부모 탓을 합니다. 조상 탓을 합니다. 3대째, 4대째 할아버지까지 올라갑니다. 이 나라의 이 민족의 대통령 탓까지 합니다. 자기 문제는 하나도 찾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주변 사람들 탓입니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합니다.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에서 같은 인간입니다.

또 다른 유형의 사람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일단은 멈추고 판단을 중지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내면을 돌아봅니다. 내가 잘못한 건 없는지, 혹시 나로부터 비롯된 문제는 아닌지 자기를 돌아봅니다. 모름지기 신앙인은 후자여야 하지 않습니까? 신앙한다는 것, 믿음을 가진다는 것, 그것은 문제가 생기면 자기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에게는 그런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조건 남 탓부터 하고 봅니다. 야곱 탓입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빼앗았고, 야곱이 내 복을 빼앗아 가버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을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마 13:4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