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본문: 창세기 27:24-36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단거리 육상 선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우사인 볼트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같은 질문에 사람들은 칼 루이스라는 이름을 말했습니다. 칼 루이스는 탁월하고 위대한 육상 선수였습니다. 그는 1984년 LA 올림픽 육상 4관왕이었습니다. 100m, 200m, 400m 계주, 멀리뛰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4년 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100m와 멀리뛰기 금메달을 땄습니다. 또 4년 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400m 계주와 멀리뛰기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멀리뛰기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는 총 네 번의 올림픽에서 아홉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멀리뛰기에서는 올림픽 4연패를 달성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칼 루이스가 올림픽에 나간다고 하면 당연히 금메달 몇 개쯤은 따올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칼 루이스는 펄쩍 뛰었습니다. 그는 TV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올림픽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가 재능이 출중한 천재들입니다. 거기에서 메달을 따고 못 따고 하는 것은 누가 더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고, 당일 컨디션에도 달려 있습니다." 그는 화를 내며 반문했습니다. "칼 루이스가 올림픽에 나가면 당연히 금메달 딴다는 건 누가 한 말입니까?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그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가 곧 다가옵니다. 지금 우리는 밥 먹고 생활하고 걷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걷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가 다가옵니다. 걷는 것이 불편하고 힘든 시기가 머지않아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불과 몇십 년 안에 식사를 하고 소화시키기 어려울 때가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 그러나 세상에 당연한 것은 우리 인생에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 에서가 나옵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권을 부여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가 사냥한 고기를 아버지께 가져다 드리면, 그는 아버지의 맏아들이자 장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장자권을 부여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당연한 것은 없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혹시 나도 에서 같은 착각을 하고 사는 건 아닌지, 혹시 우리도 에서와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사냥한 고기로 복을 얻으려 한 이삭과 에서

이삭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에서인지 야곱인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즐기는 별미를 위해서 너는 고기를 잡아 사냥하고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너를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했습니다. 에서가 이 말을 듣고 사냥하러 밖에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리브가가 야곱을 부추겨 아버지에게 축복받으러 왔습니다. 이삭은 리브가와 야곱이 이 일에 개입되어 있는 것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리브가가 급하게 염소 요리를 해서 이삭에게 갖다 줍니다. 야곱은 형의 털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섰습니다.

"이삭이 이르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창 27:25)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창 27:27)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가 마음껏 너를 축복하겠다." 이삭의 이 말은 상당히 이교도적이고 불신앙적이며,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에도 반대되고 어긋나는 말입니다. 이교도의 사제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미혹합니까? "금덩어리, 은덩어리를 가지고 와라. 돈을 잔뜩 가지고 와라. 금은보화를 잔뜩 가지고 와라. 그러면 내가 신들에게 부탁해서 너희들을 마음껏 축복할 테니 정성을 보여라, 성의를 보여라." "사냥하는 고기를 가져오면 너를 마음껏 축복하겠다"는 말이 이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무당들이 이렇게 합니다. 점쟁이들이 이렇게 합니다. 무당의 상 위에 놓인 봉투의 두께를 보고 굿을 정성껏 할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점쟁이의 상 위에 놓인 돈의 액수를 보고 점을 제대로 칠지 성의껏 할지 말지, 아니면 혼을 내고 돌려보낼지를 결정합니다. "사냥하는 고기를 가지고 오면 내가 너를 마음껏 축복하겠다"는 말이나, "돈을 많이 가지고 오면 나의 신에게 빌어서 너를 복 주게 하겠다"는 말이나 무엇이 다릅니까?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삭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영안이 어두워져서 이런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자기 동생 야곱이 그의 복을 가로챈 줄도 모르고 밖에 나가서 힘껏 고기를 잡았습니다.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이미 그때는 야곱이 지나간 이후입니다.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창 27:31)

에서가 하는 말을 보십시오. 어쩌면 자기 아버지 이삭과 이렇게 똑같은 말을 합니까?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나를 마음껏 축복하소서." 이삭이나 에서나 지금 공로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사냥하는 고기를 드릴 테니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이것이 공로주의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도 이렇게 생각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복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사냥하는 고기를 갖다 드리고 "하나님 저를 복 주십시오, 저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주십시오"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고 하란에서 불러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복이 될지라"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겠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왜 부르셨는지, 왜 하필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이셨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신비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리브가의 태중에 있는 에서와 야곱 중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말씀하시고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태중에 있는 야곱이 하나님 앞에 사냥하는 고기를 갖다 드리고 "하나님 이것 드시고 저를 선택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야곱입니까?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신비이고, 하나님의 선택의 영역,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에 속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고 하나님의 주권 아닙니까? 이것을 우리가 설명할 방법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33:12)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시 3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