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교보문고 건물엔 싯구가 실려 있다. 항상 그 싯구를 보며 위로를 받기도 했는데 시기별로 실린 그 싯구들을 모아 정리했고 우리를 위로해 준 그 시인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 문구의 내면을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고, 몇십 년의 그 문구들을 곱씹으며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 있어서 그리고 그 문구들의 전체 원문을 음미할 수 있어 좋았던 시간이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꽃>


어느 소년 소녀들이나 알고 있다. 봄이 말하는 것을. 살아라, 자라나라, 피어나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새싹을 움트게 하라. 몸을 던져 두려워하지 마라!

늙은이들은 모두 봄이 소곤거리는 것을 알아듣는다. 늙은이여, 땅 속에 묻혀라. 싹싹한 아이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몸을 내던지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헤르만 헤세 <봄의 말>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 <새로운 길>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까 그리고 그는 나를 사랑 하지 않았다는 걸?

왜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내 어린 시절이 죽었을 때 왜 우리는 둘 다 죽지 않았을까?

만일 내 영혼이 떨어져나간다면 왜 내 해골은 나를 쫓는 거지?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 <방문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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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비통한 이별이나 빼앗긴 보배스러움 사별한 참사람도 그 존재한 사실 소멸할 수 없다

반은 으스름, 반은 햇살 고른 이상한 조명 안에 옛 가족 옛 친구 모두 함께 모였느니

죽은 이와 산 이를 따로이 가르지도 않고 하느님의 책 속 하느님 필적으로 쓰인 가지런히 정겨운 명단 그대로

따스한 잠자리, 고즈넉한 탁상등 읽다가 접어 둔 책과 옛 시절의 달밤 ,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 세상에 솟아난 모든 진심인 건 혼령이 깃들기에 그러하다

김남조 <좋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