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즐기는 별미

본문: 창세기 26:34-27:4

요즘 사람들은 사이버 세상에서 챗GPT를 많이 사용합니다. 챗GPT는 사이버 세상을 평정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분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제 우리는 끝났다, 인간의 일자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오히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우리가 지금껏 누리지 못했던 유토피아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챗GPT는 오픈AI라는 회사가 새롭게 개발한 대화형 인공지능 챗봇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창의적이고 특별하며 독특합니다. 과거 40여 년 전에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30여 년 전에 개인용 PC가 각 가정마다 보급되었을 때, 2007년도에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내놓았을 때, 그때 느꼈던 충격에 버금가는 충격이 지금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아도 이것을 사용하려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질문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제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초중고 학교 교실에서, 대학교 강의실에서 질문하는 학생들은 무언가를 좀 아는 학생들입니다. 학습 내용에 대해서 선행이 되어 있어야 하고, 그 내용을 숙지하고 있어야 선생님과 주고받으며 질문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면 던져주는 수업을 따라가기에 바쁠 텐데,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챗GPT도 마찬가지로 질문거리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나오는 답이 훨씬 더 다양하고 깊이 있습니다.

제가 창을 열고 세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첫 번째,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어떤 분이신가?"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서 알려주었습니다. 30초도 안 되어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리해서 보여줍니다. 두 번째 질문, "언더우드 선교사와 새문안교회 관계에 대해서 알려달라." 그것도 역시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세 번째 질문,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를 비교해 달라." 그것도 일목요연하게 군더더기 없이 깨끗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언더우드 선교사에 대해서 보여달라"고 할 때는 아펜젤러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질문하기 나름입니다.

사실 이렇게 질문하려면 뭔가 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에 대해서만 알려달라고 하는 것과 새문안교회와의 관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세웠다는 사실, 1885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인천 제물포항에 함께 이 나라 이 땅에 최초의 선교사로 들어왔다는 사실, 그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질문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챗GPT를 사용하려고 해도 무엇을 좀 제대로 알아야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는 자의 비극

신앙생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궁극적으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묻고, 이해가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여쭈고, 내 인생에서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하나님께 따져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묻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심각합니다. 잘 몰라서 묻지 않고, 별 필요가 없어서 묻지 않고, 혹은 자기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꼭 필요한 질문을 그냥 삼켜버리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이삭이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자기 욕심에 가득 차서 하나님께 꼭 물어야 하는데 질문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믿음의 계승을 아주 완벽하게 잘 이루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 생활을 훌륭하게 했고, 그 아들 이삭도 믿음 생활을 아주 잘했습니다. 아버지의 믿음이 아들에게로 그대로 잘 계승되고 흘러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삭에서 에서로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에서에게는 문제가 참 많았습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창 26:34-35)

에서가 40세에 결혼을 합니다. 이삭도 40세에 결혼했는데 자기 아버지가 결혼한 나이와 똑같은 나이에 결혼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의 원리를 한꺼번에 깨뜨려 버립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의 원리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를 보면 한 번에 두 여자와 결혼합니다. 결혼과 동시에 가정이 파탄 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런 결혼을 어떻게 상상한 것인지, 심각한 문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가정의 영적 정통성을 그냥 무시해 버렸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 그 아들 자기 아버지 이삭까지는 그 땅에서,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에 그냥 일반적인 가정이 아닙니다. 열국의 아비요, 열국의 어미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사라가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것 때문에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사람을 저 먼 곳 밧단아람 하란까지 보낸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아들의 아내감을 열심히 찾고 또 구했습니다.

에서가 정말 그 가정에 영적인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받을 적장자였다면 자기는 이런 식으로 결혼하면 곤란합니다. 가정의 영적인 정통성을 한꺼번에 깨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서가 도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요? 나이가 적으면 철이 없다고 할 텐데, 도대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주 강한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해도 아버지는 나에게 장자권을 물려주실 것이라는 자신감, 내가 사냥하는 고기를 아버지께 가져다 드리면 아버지는 그것을 좋아하신다, 장자권을 팔아먹어도 아버지는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고, 결혼을 이런 식으로 해도 아버지는 나에게 장자권을 물려줄 것이라는 자신감이 그에게 내재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 이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에서는 그냥 자기 닥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갑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도 팔아버린 망령된 사람이었고, 결혼하자마자 가정을 위기에 빠뜨렸고, 자기 가정의 영적인 정통성도 그냥 한 번에 무시해 버렸습니다.

부모의 책임, 자녀의 책임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궁금증이 들지 않습니까? 보통 믿음의 가정에서 부모가 신앙생활을 잘 하면 그 자녀도 믿음을 잘 이어받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 믿음의 정통성을 잘 계승했는데 에서는 도대체 왜 이런 것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된 것입니까?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자녀가 나고, 악한 부모 밑에서 당연히 악한 자녀가 날 줄로 생각했는데 이 원리가 왜 이렇게 꼬이는 것입니까?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겔 18:2-3)

에스겔 선지자는 남유다가 망하고 나서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그 당시 포로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패배의식이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들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 부모가 신 포도를 먹어서 이가 시기 때문에 우리도 지금 이가 시린 상태에 처해 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상식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부모의 이가 시다고 너희 이가 시겠느냐? 거꾸로 말하면 부모가 믿음 생활 잘했다고 해서 어떻게 너희 자식들이 믿음 생활을 잘한다고 보장할 수 있겠느냐? 그런 생각을 걷어내라고 말씀합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겔 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