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편집 형식은 이 글이 본래 놓였던 웹 플랫폼(d5nz5n.com)의 형태와 강하게 관계 맺고 있다. 그렇다면 인쇄물과 웹은 주종관계에 있을까? 이것은 아카이빙에 가까운 것일까? 선별된 3편, 혹은 3편의 선별은 무슨 의미를 가지게 될까? 우선 확실한 것은 이 글이 다음 3쪽 내에 끝나야 한다는 것이다……
(생략)
글 뭉텅이가 이어지는 선집의 일반적 형태와 달리 텍스트를 종별로 쪼개 병렬시킨 형식은 그것이 시각적 페티쉬에 불과하며 독자에게 ‘읽힐’ 자신을 갖지 못한 선전선동용 텍스트와 같은 기교를 부린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일반적인 단행본 형식에 놓인 텍스트는 어떤 대우를 받는가? 그것은 지금의 인쇄―공동체가 제시하는 예절을 준수하는바, 이 책 또한 겉보기보다(만큼) 매우 예의 바르다.
약간 과도한 들여쓰기는 서로를 (미학적이기보다) 윤리적 약속의 연쇄로 얽어매는 텍스트 박스의 예절 자체를 벗어나지 않지만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규칙을 수행한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던 병렬 편집은 매일 한 편씩 다른 글을 읽는다는 웹상의 경험과 상응하지만, 좌철로 제본된 책이 가진 일관된 힘의 방향 속에서 강제적으로 텍스트를 접속시킨다. 이러저러한 특징을 말해볼 수 있지만, 이 책은 매우 ‘다르지도’ 매우 ‘경쾌하지도’ 않기를 바란다. 이 책은 여러분의 시각적 진실을 최우선으로 존중함을 약속한다
이렇듯 텍스트 박스 세 개가 주차별로 등장과 퇴장을 이어가지만 주제의 변주도 응답도 아니다. 세 개의 플롯이 엮이며 하나의 가설로 맞물려 들어간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다. 그렇지만 하나의 글이 다른 글을 끌어당기는 힘은 사실상 서로를 참고문헌으로 생성하다시피 한다. 가령 나일선의 글이 페이지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홀로 서려 할 때, 방해받지 않을 수 있을까? 강보원과 나일선이라는 박스 두 개 사이에서 시작한 김유림의 시가 홀로 마치려고 할 때, 우리가 어떤 순수함을 꿈꾸겠는가?
따라서 이 글과 책은 자신을 존재케 하는 세 편의 글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체 한다. 보이는 것(이 책)과 말하는 것(지금 이어지는 이 글줄들) 사이의 간격만이, 방금 당신의 안구가 글줄을 쫓으며 신호를 주고 받는 종이 경계면의 형상만이 분명하다.
한 진술이 다른 진술에, 한 모형이 다른 모형에 작용하는 힘은 그러나 그 자체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내재한 것이다. 사이를 만들어 놓을 때 세 개의 모형은 풍선과 같이 서로를 압박하거나 배려하거나 무관심한 채로 연결된다. 《셋 이상이 모여》는《세 개 이상의 모형》을 잘못 알아듣고 적었던 이름이 아니라 논리적 귀결로 읽혀야 한다.
다음의 일화가 이를 증명할까? 마침 김유림은 시집 《세 개 이상의 모형》을 출간했고 나일선은 읽었고 이여로는 들었지만 잘못 들었다. 하지만 이여로는 들었을 뿐이며 확실한 것은 ‘잘못’에 있지 않고 ‘들렸다’에 있다. 그래서 각자 5개씩 준비해온 제목을 말하는 동안 이여로는 듣지 않았고 왜 《셋 이상이 모여》야만 하는지, 그들에게 노트북 뒷면만을 보여주며 노트북 앞에 앉아 PPT를 만들고 있었다. "불발탄", 그렇군요, "다른 사람의 집", 네, "지인들", 아뇨, "일기유령비평", 아닙니다,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안 됩니다, "불공평해!"
이 책은 다음 페이지에 이어질 웹 페이지까지 포함하여 일종의 모듈로서 짜여지길 희망한다. 그렇기에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의혹에 가장 취약하다. 이 책은 이상의 의미 값을 단순히 진술하는가? 혹은 그에 걸맞은 진실과 효과를 독자에게 제시하는가? 상상적 가치와 실용적 효과를 혼동하진 않았는가? 강보원은 유니콘을 만드는 일이 뛰어난 문학 비평이라고,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서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최소한 "이 책은 뛰어난 문학 비평이다"라고 말한다. 참과 거짓은 담화의 효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