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 사람들

본문: 창세기 26:7-15

중국 전국 시대에 순우곤이라는 탁월한 지식인이 있었습니다. 통찰력이 남달랐던 그는 어느 날 이웃집 부뚜막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위험한 상태임을 즉시 알아본 그는 집주인을 불러 "부뚜막을 이대로 방치하면 머지않아 불이 날 것입니다. 서둘러 정리하십시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그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 집에서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달려와 급히 불을 꺼주었지만, 순우곤은 마침 출타 중이어서 자리에 없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불난 집 주인이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놓고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우리 집에 불이 났을 때 함께 도와주셔서 불을 꺼주신 것에 감사합니다"라며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순우곤 선생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며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초대하지 않으셨습니까?" 집주인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가 이분을 초대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불이 날 것이라고 저주하더니 진짜 불이 났기에 기분이 나빴고, 둘째는 집에 불이 났을 때 자리에 없어서 불을 끄는 데 힘을 보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집주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실 순우곤 선생이야말로 집주인이 직접 찾아가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당신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우리 집에 불이 날 줄을. 우리 집에 한번 오셔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살펴봐 주십시오"라고 간청해야 할 분이었습니다. 불난 집에 달려와 불을 꺼준 사람들에게는 감사하면서, 화재를 미리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은 홀대하는 것이야말로 미련한 처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어리석은 자, 악한 자, 성격이 괴팍한 사람, 비겁한 사람, 대충 살아가는 사람, 완고한 사람 등 별별 부류의 사람들이 뒤엉켜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방법이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삭도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어울려 살고 있습니다. 이삭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삶의 방식을 모색하기를 바랍니다.

깨어진 상식, 무너진 신뢰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창 26:7)

이 장면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내 사라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갈 때, 사라가 아름다워서 자기 목숨에 위협이 될까 두려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이삭도 똑같은 상황 앞에서 똑같이 행동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이 행동은 두 가지 심각한 문제를 수반합니다. 결단코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아내를 부정한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어떻게 결혼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리브가를 어떤 방식으로 데려왔는지도 기억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도하셔서 아브라함의 며느리, 이삭의 아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아내를 아내라 말하지 않고 누이라 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기만하고 부정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간혹 부모의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모를 부정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부모 중에도 자식이 자기 뜻대로 자라주지 않아서 자녀를 부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부모를 부모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식을 자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부부의 관계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이 분명한데도 내 아내를 아내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기만하는 행동입니다.

둘째, 이삭의 이 행동은 리브가와의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금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리브가는 이삭의 본심을 알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어려울 때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준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앞에서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실망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남편을 믿고 평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이삭을 이해하고 수용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서운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첫째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가치입니다. 그러나 이 가치가 사람과의 관계로 내려오면 상대적인 가치로 전환됩니다.

사람 사이의 믿음은 상호적입니다. 믿을 만한 행동을 해야 상대방이 믿는 것입니다. 남편이 평생을 살면서 입만 열면 거짓말이고 믿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믿겠습니까? 믿음이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그 사람의 삶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나도 믿음을 주고 신뢰를 줘야 상대방이 나를 믿고, 상대방도 믿음을 줘야 내가 상대방을 믿을 수 있습니다.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삭은 리브가에게 믿음의 금이 가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현실이 누추하고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그 사람이 성실하고 정직하면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저 사람과 함께라면 나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미래를 향한 것이지만, 그 미래는 현재의 모습에 달려 있습니다. 이삭의 이런 모습이 리브가에게 어떤 소망을 줄 수 있었겠습니까?

사랑 또한 주고받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사랑이 서로 오가면서 커지고, 싹이 트고,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을 받아야 줄 수 있고, 주면 또 돌아오면서 더 커지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삭은 리브가에게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온전히 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결단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짓말이 영원히 감추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블레셋 사람의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껴안는 것을 보았더라" (창 26:8)

아브라함의 거짓말도 금방 탄로 났고, 이삭의 거짓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도 불신자인 아비멜렉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짓말하는 것을 본 아비멜렉은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자기 지경에 살게 해주었는데 이런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추방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