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옥중서신 아홉 번째 시간으로, 빌립보서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3장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바울의 옥중서신은 네 권이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빌립보서는 기쁨에 대한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의 이야기를 보면, 그냥 기쁨이 아니라 상황을 초월한 기쁨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그 상황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가에 따라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구류된 상태입니다. 그 상황이 좋지 못합니다. 불편하고 갇혀 있는 상태, 언제 끌려가서 죽을지 모르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기서 궁극적인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1장을 보면 그 기쁨을 표현하면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실 자기는 여기서 죽는 것이 더 좋다고 합니다. 차라리 여기서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편한데, 자기가 살아야 할 이유는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삶의 존재 근거와 이유를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장을 보면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설명하는데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11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쭉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 했는데, 거기서 중요하게 본 것이 종의 형체, 사람의 모양입니다. 마음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진짜 종이 되셨고, 진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바울의 삶으로, 또 우리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세 가지 차원에 대해서도 증거했습니다. 칭의의 차원과 성화의 차원과 영화의 차원입니다. 영화는 내가 죽어서 천국 들어가는 것이고, 칭의와 성화가 오늘 이 땅에서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오늘 3장도 역시 그 맥락 가운데 있습니다. 칭의와 성화라는 그 큰 틀의 맥락 안에서 빌립보서 전체를 기록하고, 달려간다는 등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빌립보서가 이런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하는 것과 삼가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절에 보면 "끝으로"라고 했습니다. "끝으로"라고 나오면 '아, 끝나는구나. 좋다. 이제 집에 가도 되겠구나' 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끝으로"라고 해놓고 3장도 제법 길고 4장까지 또 나옵니다. 그래서 여기서 "끝으로"라는 것은 내가 편지를 끝맺겠다는 말이 아니라, 바울이 다른 표현으로 하면 "종말로"라는 뜻입니다. 종말로, 즉 이 세상에 종말이 왔는데 이 종말에는 이것을 정말 조심해야 한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일상적인 말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많이 들어보셨습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라는 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바울의 상황과 한번 연결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옥에 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것은 바울의 상황입니다. 감옥에 있으면 기쁩니까, 슬픕니까, 괴롭습니까? 감옥에 안 들어가 봐서 모릅니다. 그런데 상상만 해 봐도, 그냥 생각만 해 봐도, 진짜 감옥을 보기만 해도 우리는 괴롭고 힘듭니다.
그런데 굳이 감옥에 들어가지 않아도 인생 자체가 감옥이라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냥 그 자체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자기는 "감옥에서 기뻐하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조금 더 수준 있게 표현하려면 "나는 지금 감옥에 있는데, 로마에서 구류 상태로 있는데, 나는 지금 여기서 너무 기쁘다. 그러니 너희도 감옥에 있어도 기뻐하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표현을 쓰지 않고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 안에서"와 "감옥에서"가 충돌하고 대립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감옥"이라는 것은 자신의 상황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감옥에 있기도 하고, 어떨 때는 궁궐에 있을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저 인생 밑바닥 시궁창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정말 구름 위를 걸어다니는 것처럼 너무너무 행복하고 즐거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우리 인생의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매번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바뀝니다. 감옥이 어디건 계속 바뀝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감옥에서는 슬퍼하고, 구름 위에서는 기뻐 뛰고, 궁궐에서는 너무너무 행복하고, 돈이 있으면 즐겁고, 돈이 없으면 죽을 맛입니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 아닙니까? 그래서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뛰어넘어서 내가 감옥에 있건 어디에 있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 두셨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는 것인데, 너희의 궁극적인 신분은 주 안에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칭의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칭의는 신분이라고 했습니다. 성화는 그 신분의 수준에까지 올라가는 수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칭의를 받은 성도들은 내 상황과 상관없이 늘 기쁜 것입니다.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가 있는 이 주변 사물과 상황만 보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은 시선을 더 넓게, 더 높게, 더 크게 봐야 합니다. '아, 나는 주 안에 있구나.'
요셉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의 삶을 살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습니다. 거기에서 입지전적으로 꿈을 잘 해석해서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노예로, 죄수로, 또 총리로. 그런데 그것과 상관없이 요셉은 하나님 안에 있었습니다. 그가 총리의 삶을 살면서 거나하게 오만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가 노예의 삶을 살면서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았습니다. 누명 쓰고 감옥에 들어가서 그 상황 때문에 '나 혀 깨물고 죽어 버려야지' 이런 적도 없습니다. 그는 그냥 성실하게 자기 삶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궁극적인 소속은 주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요셉 이야기는 옷에 대한 모티브가 나옵니다. 그 옷이 여러 번 바뀝니다. 채색 옷, 그다음 노예의 옷, 죄수의 옷, 총리의 옷. 그런데 그 옷과 상관없습니다. 이 사람은 옷과 상관없습니다. 그의 진짜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마포, 새 옷을 입은 그리스도의 신부의 옷입니다. 그것이 이 분의 궁극적인 자기 신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내가 진짜 주 안에 있는가?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냥 얘기했고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많이 들었고 너무 많이 읽었는데,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상황을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또 "주 안에 있다"라는 말에는 십자가 아래 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구약적인 의미, 출애굽의 의미에서 말하면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르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있으면 사망이 지나갑니다. 죽음이 지나갑니다. 그러면 기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죽음을 면했는데, 내 영혼이 죽음을 면했는데, 우리가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주 안에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짜 기쁨은 주 안에서 죽을 생명이 산 생명으로, 죽어서 지옥 갈 영혼이 천국 가는 영혼으로 변모되었다는 것, 그것이 기쁜 것입니다. 상황의 기쁨은 어떻습니까? 무엇인가 있어야 기쁜 것입니다. 손에 쥐어야 기쁜 것입니다. 전부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분의 기쁨은 그냥 그 안에 있어서 기쁜 것입니다. 그 안에 있어서 기쁜 것입니다. 칭의의 기쁨을 바울은 이런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바울은 이 말을 여러 번 한 것 같습니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여러 번 말씀한 것 같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 모아놓고, 그때 교회를 개척할 때 성도들에게 설교할 때, 성경 공부할 때도 계속 이 말을 전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말을 계속 쓴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중요한 말씀은 계속 들어야 합니다. 중요한 말씀은 계속 우리가 듣고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