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 26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아멘.
오늘은 로마서 8장 두 번째 시간입니다. 로마서 8장을 두 번으로 나누어 살펴보는데, 지난주에 17절까지 보았고 오늘은 18절부터 그 이후를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우리가 보다가 마지막에 다 못 하고 마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살펴보는 김에 성령의 사역 세 가지를 한 번 더 기억하고 정리한 뒤 넘어가겠습니다.
성령의 세 가지 사역 첫 번째는 확증하는 사역입니다. 확증이란 확실히 도장을 찍어준다는 뜻입니다. "너는 내가 확실하게 나의 자녀라고 인쳤다." 이렇게 도장 찍어주는 것이 확증 사역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도장 찍어주고 확증해 주시는 것은 우리 안에 끊임없이 계속해서 찔림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혹은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을 때 마음의 갈등이 일어나고 찔림이 있다면, "아,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확증되었구나. 도장을 지금 계속해서 받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두 번째 성령의 사역은 생명 사역입니다. 생명 사역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영을 살리고 또 하나는 육을 살리는 것입니다. 육만 살리고 영은 죽이는 것이 아니요, 영만 살리고 육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공히 살리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세 번째 성령의 사역은 양자 사역입니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의붓자식으로, 남의 집 자식으로, 죄의 자녀로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인도하시고 확정해 주셔서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아들의 영을 받았습니다.
종의 영이란 희망이 없는 영을 말합니다. 내일이 없습니다. 그냥 오늘 주인이 시키는 것을 하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고, 내일이 없고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소망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가 이 재산 너에게 다 주마. 내가 이 집 너에게 다 주마. 나만 믿고 따라와." 약속을 합니다. 그래서 아들은 소망이 있고 미래에 대한 꿈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를 양자 되게 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사역이 아주 중요한데, 그중에 우리가 살펴보지 못한 것을 하겠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아빠 아버지"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익숙합니다. 우리도 아이들이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말이 그 옛날 예수님 시대 때도 아람어 방언으로 유대인들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자기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표현이 "아빠"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말 발음이랑 예수님 시절에 아람어 방언이랑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빠 아버지"라고 하니까 꼬맹이들이 부르는 말인가 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절에 직접 사용했던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빠 아버지"를 언제 사용하셨는가? 마가복음 14장 36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언제 어디에서입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입니다. 지금 이 장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갈등 가운데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어떤 갈등을 하고 있었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적인 갈등을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기 싫습니다. 두렵습니다. "제가 과연 이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요? 저는 십자가 지는 것이 몹시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구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조차 없습니다. 무서워서 아버지께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께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저 못하겠습니다. 너무 무섭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등하는 자리에서, 인생의 가장 깊은 고민과 고뇌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이 "아빠 아버지"라는 표현은 정말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때 그때 부른 것입니다. 그렇게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 "아버지"라고 부르면, 우리에게는 권리가 주어지는 반면에 동시에 의무도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 양자 사역이라고 했으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는 양자로 입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딸,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권리와 하나님의 모든 자원을 내가 받아서 누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권한과 권리와 동시에 의무도 함께 따라옵니다. 그 의무가 무엇입니까? 고난입니다.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나의 부모,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고 함께 한 집에서 수십 년 동안 오랫동안 살면 부모의 영광만 누릴 수 있습니까? 부모의 허물도, 부모의 책임도, 부모가 혹시 인생을 잘못 살아서 뒤집어 쓰는 각종 모욕과 불명예도 자녀가 함께 져야 합니다. 사업하다가 부모가 실패하면 그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녀에게도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녀가 "나는 이거 싫습니다. 나는 부자 아버지는 좋은데 가난한 아버지는 싫습니다. 나는 건강한 아버지는 좋은데 몸이 불편한 아버지는 싫습니다." 어찌 그를 자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 아닙니다. 어떻게 자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영광도, 하나님의 자원도, 권리도 함께 누리는 것인 동시에 고난도 받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양자가 되면 같이 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러므로 우리를 양자 됨의 특권을 주시고, 성령의 사역이 양자 됨을 깨닫게 하시는데, 양자가 된다는 것은 두 가지를 함께 기억하셔야 됩니다. 영광도 고난도 함께 온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피하게 해 주시고 영광만 받게 해 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둘 다 하든지 둘 다 하지 않든지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세트로 함께 옵니다. "전 이거 싫습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얻은 것처럼, 십자가 없이 부활이 어떻게 있습니까? 십자가 없이 승천이 어떻게 있습니까? 고난이 있고 부활이 있고 그 이후에 승천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원래 지난주 마무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