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따르니라

마가복음 2:13-17

1. 유목민의 신앙

유현준 교수가 쓴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책을 보면 종교와 건축 간의 상관관계를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와 이집트 종교는 야훼 신앙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종적도 없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 책에서는 과도한 신전 건축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대단한 신전, 엄청난 신전을 지어놓고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고, 그 자리에서 공동체의 결집을 과시합니다. 하지만 전쟁 때가 문제입니다. 전쟁이 되면 살아남기 위해서 다 버리고 흩어지지 않습니까? 흩어졌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모입니다. 모여보니 신전이 다 파괴되어 있습니다. 불타 있고 다 무너져 있습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실망합니다. 낙심합니다. 내가 믿는 신이 이것밖에 되지 못했던가? 지금 이렇게 불타버린 신전을 우리가 목숨 걸고 세우고 섬겼단 말인가? 그래서 그 종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원래가 유목민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실 때 그들은 이집트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성막을 지었습니다. 성막은 이동용 예배 천막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눈에 보이는 엄청난 하드웨어적인 성전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소중하게 여길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은 정말 보잘것없는데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두 돌판, 십계명의 말씀, 이 말씀은 생명처럼 붙들고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유목민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들의 발이 닿는 곳이 바로 하나님 신앙의 확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야훼 신앙이 더 멀리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솔로몬 성전 이후에 그들의 신앙은 급속도로 쇠락기를 겪습니다. 사실 솔로몬 성전 이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다 성막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성막 시절에 그들은 더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도 더 뜨겁고 더 열정적이었습니다. 다윗 시절이 가장 최고조, 전성기 아닙니까? 그런데 솔로몬 시절에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의 신앙은 쇠락기를 거듭하고 또 거듭합니다. 급기야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흡수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인생도 항상 정착하는 것, 무언가 만들고 짓는 것을 좋아합니다. 보다 더 눈에 보이고 더 화려하고 더 괜찮은 곳에 머무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DNA 속에 심어놓은 것은 바로 유목민의 전통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모든 것 다 털고 일어나서 주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걸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세워놓은 것이 많으면, 만들어 놓은 것이 많으면, 지어놓은 것이 너무 거대하면 우리는 손 털고 일어서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 머물러 있는 자리가 어느 자리인지 잘 살펴보시고,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모든 것 두고 주를 따를 수 있는지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는 시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바닷가로 나가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그 무리들을 앉혀놓고 주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사역은 크게 세 가지인데, 첫째는 가르치시고, 두 번째는 고치시고, 세 번째는 전도하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은 가르치시고 그중에서 병든 자는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각 마을로 들어가셔서 주께서는 전도하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무리들을 가르치고 나서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을 데리고 세관으로 가십니다. 그 세관에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 14절을 보겠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오해하면 예수님께서 우연히 길 가다가 길에 있는 사람을 보시고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너 나를 따라와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결코 그렇게 즉흥적으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주도면밀하고 계획적이며 뜻을 가지고 사람을 부르시고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1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제자를 이렇게 부르셨다고 기록됩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어떤 자들을 부르셨습니까? 자기가 원하는 자들입니다. 주께서는 분명히 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 마태를 부르려고 이곳으로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진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2-1. 세리 레위의 부름

여기 이 레위는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됩니다. 이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였습니다. 그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부르시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이 마태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나를 따르라"는 말이 "잠깐만 날 보고 너 그냥 그 자리에 있어라" 이 말이 아닙니다. "너는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직업을 내려놓고 포기하고, 이제는 세리직 다 때려치고 나를 따라와라. 내 제자가 되라"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것이 마태에게는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세리는 어떤 직업입니까? 눈 한번 딱 감으면 굉장히 괜찮은 직업입니다. 동족들의 피를 빨아서 로마에게 상납하고, 그 남은 것으로 자신의 배를 불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이 되고, 동족들에게는 매국노 소리를 들을지라도 한두 번이지, 열 번이 되고 스무 번, 백 번이 되면 그다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돈이 생깁니다. 그 돈은 엄청난 돈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을 다 편하게 먹고 살게 할 만큼, 그리고 자손들까지 다 편하게 살게 할 만큼 굉장히 많은 돈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이 세리 자리는 낙하산으로 누가 꽂아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전문직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됩니다. 로마법도 공부해야 되고 세법도 공부해야 되고, 머리가 좋아야 되고, 경쟁자들이 많아서 시험을 쳐서 통과해야 됩니다. 그런 자리를 이 마태가 오기까지 얼마나 수고했을까요?

2-2. 카데마이의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