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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킨셀라 아주머니는 “우리처럼 나이 많은 가짜 부모”라고 스스로를 깎아내리지만, 그들은 소녀에게 처음으로 부모다운 부모가 되어준 사람들이었다. 아이는 침묵 속에서 많은 것을 말한다. 갓 태어난 아기가 우량아라고 하니 소녀는 “참 잘됐네요”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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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을 배제한다. 모두가 알 수 있는 일들이 아니라, 극소수만 알고 있는 일들이 생기는 순간, ‘공개된 이야기’와 ‘공개되지 않은 이야기’의 격차가 생겨버린다. 비밀이 있는 곳에서는 부끄러운 일이 일어난다. 숨겨야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부끄럽거나 숨기고 싶은 일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걸 비밀로 하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상처가 발생한 현장을 은폐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밀이 태어나는 곳에는 상처도 함께 태어난다. 작은 비밀조차도 언젠가는 더 커다란 비밀을 낳는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비밀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비밀이 오래 지속될수록, 비밀로 인해 이득을 얻는 사람들은 권력을 얻게 되고, 비밀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상처는 더욱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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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읽으며 나는 그런 ‘비밀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장면 때문이다. 아주머니와 우물에 함께 가는 것을 비밀로 해야 하느냐고 묻는 아이에게, 아주머니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아이를 돌려세워 아주 한참, 가만히 바라본다. 아이가 아주머니의 눈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이다. 소녀는 다만 바라본다. 짙은 파란색 속에 군데군데 다른 푸른색이 섞여 있는 아주머니의 눈동자를. 아주머니는 단호하게 말한다. “이 집에 비밀은 없어, 알겠니?” 혼내는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알려주려는 것이다. 아이는 부끄러운 듯 망설이다가 그대로 따라 한다. “네, 이 집에 비밀은 없어요.” 아주머니는 이어 덧붙인다.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왜 이 순간 눈물이 솟구치는 걸까. 나에게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해야 한다고 속삭이는 듯한 아주머니의 단호함에 소녀는 놀란다. 놀라면서도 기쁘다. 기쁘면서도 슬프다. 이 어린아이의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이런 둔중한 울림은 처음이기에. 소녀는 울지 않으려고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힘들어도 비밀, 슬퍼도 비밀이었던 소녀의 삶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아주머니는 소녀의 어깨를 안아주며 말한다. “넌 너무 어려서 아직 모를 뿐이야.” 하지만 소녀는 안다. 이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음을. 이런 비밀 없는 소통을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기에,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이 장면에서 소녀와 아주머니 사이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그냥 잠시 친척 아이를 맡아주는 그런 사이가 아닌, 아주 진지하고 깊이 있는 사이가 된 것이다. 우리 사이엔 비밀은 없다고.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라고.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건 없어도 된다고.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그런 자유롭고 마음 편안한 분위기를 아이는 처음으로 경험해본 것이다. 부모가 아이들을 보살필 시간이 항상 부족하기에 웬만한 감정과 욕구는 그저 꾹꾹 참아가며 지낸 소녀는 이제 참지 말고 모든 것을 다 말해도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웠을까. 그리고 그동안 참아왔던 시간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여겨진다는 것은 왜 이토록 눈물겨운 일일까.

이토록 사랑받는 동안, 아이는 훌쩍 크고, 소녀를 향한 킨셀라 부부(에드나와 존)의 마음은 더욱 깊어지지만, 어느새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고 이제는 떠날 순간이 다가온다. 소녀의 남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이제 개학을 하려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새로 산 구두를 길들이러 가자’고 손을 잡는 킨셀라 아저씨는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간다. 아이가 넘어지거나 다치지 않게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는 킨셀라 아저씨. 아이는 당황한다. 아저씨가 손을 잡아주자, 아빠가 한 번도 자신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는 것이다.

“남동생이 생겼구나. 4.1킬로그램이래.” “참 잘됐네요.” 내가 말한다. “너무 그러지 마.” 킨셀라 아저씨가 나무란다. “네?” 내가 말한다. “그리고 월요일에 개학이래.” 아주머니가 말한다. “주말에 널 데려다달라는구나, 옷도 준비하고 해야 한다고.” “그럼 돌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 아주머니가 말한다. “그렇지만 너도 알고 있었잖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편지를 본다. “우리처럼 나이 많은 가짜 부모랑 여기서 영영 살 수는 없잖아.”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불을 빤히 보면서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다. 킨셀라 아저씨가 밖으로 나가는 것 같다. 소리가 들린다기보다 느껴진다. “속상해하지 말고.” 아주머니가 말한다. “자, 이리 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