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하므로 간구하매

본문: 창세기 25:19-21

19세기 실학자 심대윤(沈大允)은 평생을 유학자로 살다가 늙어서 집을 한 채 지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 현판에 '오무헌(五無軒)'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섯 가지가 없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없다고 고백한 다섯 가지는 맹자가 가르친 오상(五常), 곧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었습니다. 유교 사회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던 가르침을 평생 추구했으나, 정작 자신에게는 이 다섯 가지가 없다는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진정한 앎이 시작됩니다. 나의 무능을 인정하고, 아는 척하지 않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미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달음이 시작됩니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것이야말로 교만입니다.

지구는 시속 1,700킬로미터의 속도로 자전합니다. 이토록 빠르게 움직이면 소리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소리를 못 듣는다고 해서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주 공간에 소리를 전달할 매개물질이 없어서 우리가 듣지 못할 뿐입니다.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다 알고, 성경을 다 읽었고, 교회를 오래 다녔고, 예수 그리스도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만이 시작됩니다. 나의 무능을 인정하고 내가 못하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기도하게 됩니다.

물러남의 아름다움

오늘 본문은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한 이삭이 장애물을 만납니다. 못하는 것을 만납니다. 이삭은 이 어려움과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오늘 말씀이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창 25:19-20)

아브라함이 백 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이 사십 세에 결혼했으니 그때 아브라함은 백사십 세였습니다. 이삭이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을 때가 육십 세이니, 그때 아브라함은 백육십 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칠십오 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단순하게 계산해 보면 아브라함은 쌍둥이 손자들을 품에 안아보았습니다. 한두 해가 아니라 십오 년 동안 에서와 야곱이 청소년이 될 때까지 그들의 재롱을 보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이야기를 전혀 기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세기 25장 8절에서 아브라함이 죽어 그의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기록하며, 이미 아브라함을 역사의 후면으로 물러나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웃포커싱하고 이삭을 줌인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옛날 동화를 보면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고생을 많이 했으니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행복하게 살았다는 한 줄만 넣어주면 읽는 사람도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런 기록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을 빨리 물러나게 하고 이삭을 등장시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손에서 역사의 전면에서 쓰임받을 때가 있고, 이제는 물러서서 후퇴할 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 3: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백일 때, 돌 때, 나이마다 아름답습니다. 그 아이들이 청년이 되면 멋지고 듬직하고 아름답습니다. 장년이 되면 이 나라의 미래를 맡겨도 될 만큼 믿음직합니다. 노년의 백발도 아름답습니다. 어르신들이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센 모습으로 예배당에 나오시는 할머니들, 건강한 곳보다 아픈 곳이 더 많은 할아버지들, 얼마나 아름답고 귀합니까? 하나님은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노년은 노년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대로 아름답습니다.

아브라함이 칠십오 세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자기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떠났습니다. 아름답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떠나 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버리지 않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고 회개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모리아 산에 아들을 데리고 올라가 번제단에 올려놓는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자리를 이삭에게 내어주고 하나님께서 물러나라 하시니 역사의 후면으로 물러앉는 아브라함의 모습, 이것이야말로 귀한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은 이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보다 육 개월 먼저 오신 분입니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청렴했습니다.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를 잡아먹고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메시지는 힘이 있었습니다.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예루살렘 대도시에서 그가 살고 있는 광야까지 세례를 받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모습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님을 따라 가버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못한 자"라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 입으로 말한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소리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소리의 정체성은 전달입니다. 의미를 전달하고 소리는 사라져야 합니다. 동굴 속에 들어가서 외치는데 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으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소리는 사라질 때 의미가 있습니다. 정확하게 전달하고 사라져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사라지는 소리 같은 존재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습니다. 예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이보다 더 큰 이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정체성입니다.

아브라함은 역사의 뒷면으로 물러나고, 이삭을 등장시키고,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을 이삭에게 일임하고 넘겨주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2023년 '새롭게 다시 시작합니다'라는 표어를 가지고 출발하면서 많은 것들을 바꾸고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아주 중요한 것 하나가 3040 하이 공동체를 새롭게 출발시킨 것입니다. 30대 40대 미혼 공동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