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매

본문: 창세기 25:1-10

소고기는 오늘날에도 비싼 음식에 속합니다. 온 가족이 함께 한우를 구워 먹으려면 큰 마음을 먹어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이보다 더했습니다. 그 당시 소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평민들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농경사회였기에 소를 도축하는 것은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병든 소, 다친 소, 이제는 쓸모없어진 소가 아니면 도축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가 없이 소를 도축했다가 적발되면 초범이라 할지라도 태형 100대에 징역 3년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평민에게만 적용되는 잣대였습니다. 양반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한양 도성 안 성균관에는 항상 허가받은 소 도축장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제사가 자주 있었고, 성균관 유생들을 격려한다는 명분으로 소를 잡아 고기 잔치를 열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겉보기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사실은 고위 관료들과 양반들이 이를 핑계 삼아 고기를 먹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성균관에서 소 잡는 날이 되면 양반들은 줄을 서서 소고기를 얻어 갔습니다. 이런 이중잣대가 조선시대에는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한 가지 잣대만 있어야 하는데, 평민들에게는 이런 잣대, 양반들에게는 저런 잣대를 적용하니 그 나라가 건강할 리 없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말할 때, 복음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이유는 잣대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돈도 권력도 물질도 지혜도 지식도 학벌도 어떤 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그 피의 능력을 믿고 내가 죄인임을 고백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구원 얻을 길이 없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는 동일한 잣대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감출 수 없는 죄, 드러나는 비행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여호수아나 다윗이나, 우리가 생각할 때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입니까?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그분들의 비행과 악행, 그분들이 저지른 크고 작은 잘못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가감 없이 적어 두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해서 죄를 감추거나 묻어두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본문도 아브라함의 마지막 38년을 다루고 있는데, 아브라함의 비행과 허물, 그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창 25:1)

창세기 12장부터 25장까지 오는 동안에 아브라함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창세기의 방대한 부분이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길고 긴 아브라함 이야기 중에 오늘 이 짧은 한 절이 가장 당혹스럽습니다. 이 한 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했다는 사실 자체가 난해합니다. 그런데 원문을 살펴보면, 원문에는 있고 한글 개역개정 성경에는 빠져 있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이오셰프'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다시'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 킹제임스 버전에는 'then again'이라고 옮겨 두었습니다. 그 의미를 충실히 살렸습니다. 'Then again', 그리고 다시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는데 그의 이름이 그두라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리고 다시' 후처를 맞이했다면, 그 이전에도 후처를 맞이한 적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첫 번째 후처가 누구입니까? 하갈입니다. 하갈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했습니다. 두 번째 후처입니다. 그 두 번째 후처의 이름이 바로 그두라입니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합시다. 그런데 문제는 시기입니다. 하갈을 맞이한 시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두라를 맞이한 시기가 과연 언제입니까? 사라가 죽기 전입니까, 사라가 죽고 나서입니까?

아브라함 일생의 말년에 가장 중요한 일, 그가 공을 가장 많이 들인 일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맞이하는 일이었습니다. 일생일대의 가장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아브라함은 직접 가지 못했습니다. 기력이 쇠해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 다메섹 엘리에셀을 불러다가 몇 번이나 다짐받습니다. 그에게 당부하고 기도해 주고 먼 길을 떠나보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기력이 있었다면, 거기 갔다 올 만한 힘이 남아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자기가 직접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종을 보낼 정도로 그는 기력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은 후에 그두라를 아내로 맞이해서 6명의 아들을 두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또 한 가지, 만약 사라가 죽은 후에 아내를 맞이했다면 '후처'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내가 죽었기 때문에 그냥 '아내'라고 표현하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후처'라고 명확하게 명시해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은 사라가 죽기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실 이 사건은 창세기 16장과 17장 사이에 위치해야 옳은 본문입니다. 창세기 16장에는 아브라함이 하갈을 맞이해서 이스마엘을 낳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마엘을 낳고 나서 아브라함은 13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고, 창세기 17장이 시작되면서 99세가 되었던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불러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말씀하실 동안, 13년의 긴 공백과 침묵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13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첫 번째 후처 하갈을 맞이해서 이스마엘을 낳고, 두 번째 후처 그두라를 맞이해서 6명의 아들을 낳았던 기간이 바로 이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비행을 기록하신 이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왜 굳이 그때 창세기 16장에서 밝히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비행을 이제 와서, 그의 죽음과 함께 밝히시는 것입니까? 읽는 사람이 불편하게 말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아름답게 마무리했으면 좋겠는데, 그의 일생의 마무리가 복되고 좋은 일만 가득하고 축복 가득하게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는데, 왜 굳이 "그가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라고 기록하셨습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더 이상 실망할 것이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일이 틀린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은 모든 것이 선을 이루는, 우리를 위한 일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