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과 리브가

본문: 창세기 24:54-67

서울시 서대문구에 가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두 장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서대문형무소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문입니다. 독립문 앞에 서면 두 개의 주춧돌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는 영은문의 주춧돌이고, 다른 하나는 모화루의 주춧돌입니다. '영은'이란 은혜를 베푼 사신을 영접한다는 뜻이고, '모화'란 중화를 흠모한다는 뜻입니다. 태종 7년인 1407년, 태종 임금은 모화루를 짓고 그곳에서 친히 중국 사신을 영접했습니다. 그때부터 조선의 왕들은 모화루에서 중국 사신을 몸소 맞이하고 배웅했습니다. 모화루는 조선이 중국에 사대 외교를 행한 굴욕과 치욕의 상징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자주 독립국가였지만, 내용적으로는 사사건건 중국의 간섭을 받아야 했던 굴욕의 500년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자, 고종 임금은 기다렸다는 듯이 삼전도비를 없애고 모화루를 철거해 버렸습니다. 그 이듬해 서재필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프랑스 개선문을 본뜬 독립문을 세웠습니다. 이 독립문은 중국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의미하는 역사적 건축물입니다. 우리는 독립이라고 하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만 생각하는데, 사실 독립문은 중국으로부터의 자주 독립을 상징합니다.

여기까지가 역사책에 기록된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2023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독립문을 볼 때 어떤 느낌으로 바라봐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정녕 자주 독립국가입니까?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이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책에만 가두어 둔 채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역사를 오늘의 현실에 적용하고 교훈을 찾을 때, 비로소 살아 숨 쉬는 역사로 다시 기록될 수 있습니다.

성경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나라 사람 이름을 왜 알아야 하며, 그 지명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과 함께 맺어가신 언약의 샘플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성경책에만 가두어 놓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들이 맺은 언약과 그 놀라운 사건들을 우리의 것으로 가져올 때 비로소 의미가 되고, 오늘 우리에게도 역사가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은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정생활, 사회생활, 일상생활에 깊은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떠남의 결단

라반이라는 인물은 물질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런 사람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은 원칙적으로 접근했고,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을 드러내며 결국 돌파해 냈습니다. 그러나 라반은 만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창 24:55)

며칠 혹은 열흘을 더 머물게 하라는 말은 몸값을 더 높이겠다는 라반의 전략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지고 있을 아브라함의 종이 아닙니다. 그는 또다시 원칙적으로 접근합니다.

"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창 24:56)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이 합의한 것은 리브가가 결정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리브가는 신랑 될 이삭의 얼굴도 본 적이 없습니다. 자신이 시집가서 살아야 할 가나안 땅 헤브론 지역은 꿈에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땅으로,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을 따라 길을 떠나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결단이 가능했을까요?

리브가가 이렇게 결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결혼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것, 하나님께서 분명히 자신을 들어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의 간증을 들으면서 그가 어떻게 이 일을 하게 되었는지를 들으며 온몸에 전율이 돋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분명하고 확실하다는 근거가 있었기에 그녀는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지 분명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가 지금 당장 따라 나서겠다고 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이 떠남의 원리는 결혼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 전반에 적용됩니다. 죄악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일어나서 떠나야 합니다. 주저앉아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사명을 위하여 부르시면 그 부르심에 순종해서 일어나 길을 떠나야 합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막 1:19-20)

야고보와 요한이 아버지 세베대를 배에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 내용만 읽으면 불효막심한 사람 같고 정신 나간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아버지를 배에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간 이유는 그 부르심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지금 나를 부르시는 이 부르심을 놓쳐 버린다면, 여기서 미적거리고 있다가 이 말씀을 붙잡지 못한다면,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들은 기회를 붙잡은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부르심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부르실 때, 그때 일어나서 순종하고 떠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코로나 3년을 지나면서 우리는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나도 모르게 나태해져 있었습니다. 그냥 이렇게 믿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조금 더 헌신하고, 조금 더 부지런하고, 조금 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세월이 흘러 그냥 이렇게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일어나라고, 사명의 자리로 나오라고, 이제는 일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이제는 섬기고 봉사하고 함께 하자고 말씀하실 때, 그 부르심이 확실하다면 떠나야 합니다. 그 편안한 자리, 안주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떠나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 우리가 새롭게 살 길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길을 떠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길을 떠나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리브가는 자기가 평생 살아온 고향집을 떠나서 사라의 뒤를 이어 열국의 어미가 되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부르신다면, 그 부르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