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24:10-27
중국 전국시대 후기, 제나라에 맹상군이라는 유명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식객들이 늘 가득했는데, 그중에 풍훤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재주가 뛰어나고 통찰력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맹상군이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하루는 풍훤을 불러 심부름을 시킵니다. 멀리 설 지방에 빚진 사람들이 많으니 가서 돈을 받아오라고 명합니다. 풍훤이 묻습니다. "제가 받아온 빚으로 무엇을 사오면 될까요?" 맹상군이 답합니다. "네가 잘 살펴보고 우리 집에 없는 것을 사오거라." 명을 받들고 설 지방으로 간 풍훤은 빚진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빚 문서를 가져오라 하고는 전부 태워버렸습니다. 면책해 준 것입니다.
돌아온 풍훤에게 맹상군이 묻습니다. "무엇을 사왔느냐?" "이 집에 없는 의로움을 사왔습니다." 맹상군은 더 묻고 싶었으나 한마디도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정치라는 것이 원래 오르내림이 있고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곳인지라, 맹상군도 이를 피하지 못하고 권모술수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가 됩니다. 아무도 그를 받아주고 반기는 곳이 없었는데, 설 지방 사람들이 그를 환대합니다. 그 지방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십 리 밖부터 나와서 환영합니다. "이곳에서 쉼을 누리시고 다시 회복하시어 복권할 때까지 편안히 계십시오." 그제야 맹상군은 풍훤이야말로 자신에게 훌륭한 일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 등장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대단히 훌륭한 종이었습니다. 풍훤이나 다메섹 엘리에셀이나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훌륭한 종이었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일꾼인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종인가를 함께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노년에 이르러 한 가지 큰 숙제를 아직 풀지 못합니다. 아들 이삭의 결혼 문제가 그의 인생에 큰 숙제였습니다. 그래서 종 다메섹 엘리에셀을 불러 다짐을 받습니다. 이 땅 가나안 자손의 여인 중에서 아들의 아내감을 택하지 말고, 자신의 고향 족속에게로 가서 여인을 데려오라고 명합니다. 가나안 땅의 영적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신붓감이 아니라 사명자를 택하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의지였습니다.
종은 이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합니다.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창 24:10)
이렇게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헤브론에서부터 메소포타미아 하란까지는 거리가 약 800킬로미터나 됩니다. 이렇게 먼 거리를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건강의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늙은 종이었습니다. 체력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둘째는 속도의 문제입니다.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낙타 열 필을 끌고 함께 갑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낙타 열 필은 혼자 끌고 갈 수 없기에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가야 합니다.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속도를 자기 마음대로 낼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안전의 문제입니다. 사막 광야에는 약탈자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납니다. 여인을 찾으면 여인의 친정에 결혼 지참금을 주고 와야 합니다. 금붙이, 은붙이, 각종 패물을 함께 가지고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빼앗기는 것도 두렵고 생명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은 토달지 않습니다. "제가 나이가 많지 않습니까? 주인님, 제가 늙었지 않습니까? 안전에도 문제가 되고 제 건강에도 걱정이 되고 속도에도 문제가 되는데, 저 말고 잘할 수 있는 젊은 사람을 보내십시오. 종들이 많지 않습니까? 왜 하필 제가 가야 됩니까?" 이렇게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24장 2절을 보면 이 종의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이라고 합니다.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소유를 맡았다는 것은 종들 중에 최고참이라는 뜻이요, 능력 있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늙은 종이라는 말은 이 직책을 수행한 지 오래되었다는 뜻입니다.
원래 권력이라는 속성은 한 자리에 오래 있으면 힘이 생깁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자리라도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힘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아브라함 가정의 모든 것을 통솔하는 늙은 종, 사실 아브라함보다 그의 집안 모든 것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종들의 생리를 알고 있고, 다루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정도 되면 아브라함이 이 종을 다루기가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 데리고 있었던 늙은 종, 편하려면 한없이 편할 수 있는데 불편하기 시작하면 한없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못한다고 버티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다윗에게도 불편한 일꾼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요압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다윗이 이곳으로 가서 전쟁하라면 이곳에서 전쟁하고, 저곳으로 가라면 저곳에서 전쟁하는 군대 장관입니다. 능력은 출중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버거운 인물이었습니다. 다루기가 어려웠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었고 다윗 왕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원수를 갚기 위해서 아브넬을 살해해 버렸습니다. 다윗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그렇게 했기에 나라가 혼란에 빠집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윗이 부탁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해 달라." 하지만 요압은 다윗의 말이 안중에 없습니다. 상수리나무에 압살롬이 걸렸는데 아직 생명이 붙어 있는데도 그 심장을 자기 창으로 찔러 버렸습니다. 다윗의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평생 동안 요압과 함께했지만 다루기 쉬운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분명히 자기 휘하에 있는데, 분명히 내 사람인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다윗이 죽기 전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길 때 이렇게 말합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려 그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너는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왕상 2:5-6)
오죽하면 다윗이 이렇게 유언까지 했겠습니까? 죽기 전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불편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사건과 이런 모습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일꾼인가? 하나님은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실까, 편하게 생각하실까? 하나님이 다루시기에 나는 편안한 사람인가, 하나님이 다루실 때 불편한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