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23장 1-6절
2022년 연말, 대학 교수들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가 발표되었습니다. '과이불개(過而不改)'라는 말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치인부터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시대의 자화상이 되었다는 씁쓸한 진단이었습니다. 잘못을 알면 부끄러워하고 고치는 것이 상식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발전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 못합니다. 잘못도 하고, 실수도 하고, 죄도 짓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깨달았다면 고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고치고 돌이켜야 성장합니다. 그렇지 않고 가만히 머물러 있으면 믿음은 정체되고, 정체된 믿음은 곧 퇴보합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은 믿음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회개에 있었고, 돌이킴과 순종의 삶에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지금 나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함께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칭찬받습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 여호와 이레의 복도 받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났습니다. 약 22년의 시간이 경과합니다. 아브라함도 늙어가고, 피할 수 없는 슬픔이 가정에 찾아옵니다.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나이라" (창 23:1)
사라가 127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은 열 살 차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137세, 사라가 127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 사라가 65세에 가나안 땅에 처음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때부터 62년 동안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 생활을 해왔습니다. 오르내림도 있고 부침도 있고 문제도 있고 쉬지 못한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62년 동안 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세상을 떠납니다.
한 여인으로서 사라의 인생은 어떠했습니까? 여인으로서 보면 사라는 불행한 인물입니다. 자녀를 낳지 못했습니다. 조카 롯도, 다메섹 엘리에셀도 하나님이 다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게 할 때,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할 때, 그 여인의 찢어지는 가슴과 절박한 심정이 과연 어땠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여인 사라에게 90세가 되어서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삭을 주셨습니다. 아들의 나이 37세, 그 아들이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서 어머니에게 안겨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손자 하나 안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여인의 일생으로서는 완전하지 않은 삶입니다.
그런데 한 신앙인의 인생으로 보면 그녀는 성공한 인생입니다. '사래'는 공주, 왕비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라'로 이름을 바꿔 주셨습니다. 열국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의 길을 경조했습니다. 믿음 생활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충만하고 기쁘고 감사한 생활을 하다가,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에 천국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떠나간 사람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남아 있는 아브라함은 슬픔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62년 동안 함께 믿음 생활을 해왔고, 평생을 함께 동역자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라의 죽음 앞에서 아브라함은 슬픔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니라" (창 23:2)
'슬퍼하다'는 '사파드'라는 단어입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는 뜻입니다. '애통하다'는 '바카', 목소리를 높여 통곡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온몸을 쥐어뜯으며 목소리를 높여 슬피 울며 사라의 죽음을 가슴 아파합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낯설게 보이십니까? 적어도 내가 아는 아브라함이라면, 믿음의 조상이라면, 아내의 죽음 앞에서 품격 있고 격조 있고 우아하게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울지 말라, 지금 내 아내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이삭을 달래고 조문하러 온 사람을 위로해야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감정이라는 선물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노애락의 감정을 주셨습니다.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감정도, 충분히 기뻐할 수 있는 마음도 우리에게 이미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충분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그냥 그대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예수님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3-35)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하는 나사로, 그의 누이들 마르다와 마리아, 예수님과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습니까? 나사로의 부고를 받고 예수님이 달려왔더니 그들이 울고 있습니다. 문상 온 사람들이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지 않습니다. 나무라지 않습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예수님께서 그들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왜 우느냐? 내가 조금 있다가 그를 다시 살릴 텐데, 너희는 눈물을 멈추어라"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함께 울어줍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함께 울어 주는 것이 훨씬 더 위로가 됩니다. 부활의 능력자이신 예수님께서, 곧이어서 나사로를 다시 살릴 예수님께서도, 함께 울어주는 그 마음으로 슬픔을 위로합니다.
사랑하는 자의 죽음 앞에서 같이 울어 주고 함께 눈물 흘리고 손잡아 주는 이 위로가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위로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눅 19:4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