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옥중서신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에베소서가 끝나고 이제 빌립보서 두 번째 시간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때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은 사실 에베소를 향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를 강권적으로 역사하시고 인도하셔서 바울이 에베소로 가지 못하고 유럽으로, 마게도냐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기대하지도, 예기치도 않은 일이 거기에서 일어납니다.
빌립보 지역은 로마의 위성도시, 로마의 계획도시였기 때문에 거기에 유대인 공동체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회당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바울에게는 복음 전도를 자기 뜻하는 대로 더 열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강가에 나가보니 거기 여성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중에 자색 옷감을 파는 사람, 루디아도 있었습니다. 루디아부터 그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교회는 여성 성도들이 굉장히 많았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를 보면,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여성들에게는 사랑이 많지 않습니까.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기도하는데, 그냥 사랑이 많아지고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지식과 총명이 더해져야 사랑이 풍성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되고,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게 되며, 그 결과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나는 지금 죽어도 하나님 앞에 가기 때문에 나는 지금 죽어도 오히려 죽는 것이 훨씬 더 나에게는 유익이다. 그런데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너희에게 기쁨이 되고 너희를 성장시키는 것이 너희에게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다"라고 자신이 사는 이유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강한 권면을 하는데,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로마인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옷을 입고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그 권면이 빌립보서 1장의 흐름이었습니다. 이제 2장은 본격적으로, 그렇다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려면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그 모델이 누구이겠습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는 어떠해야 합니까? 바울의 관심은 항상 교회 공동체였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절을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좋은 말이 다 있습니다. 권면, 위로, 교제, 긍휼, 자비. 좋은 말이 다 있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 흔히 하는 말들이 여기 다 있습니다. 좋은 말이라고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이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것들이 다 있는데, 이런 것들이 있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우리가 있다고 이야기하면 무엇 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다음에 이야기하는 것이 없는데 이것을 꼭 갖춰야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라고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교회 공동체는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같은 사랑, 한 마음.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쉬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입니까?
제가 가끔 주례할 때 이 본문을 가지고 신랑 신부에게 말씀을 전하는데, 여기서 "같은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왜 이 말이 중요한가 하면, 가정에서 부부가 많이 싸우지 않습니까. 다투고 싸우고 갈등하고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싸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싸움의 원인을 깊이 들여다보고 성찰해 보면, 자기 주장이 있으니까 싸우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 남편의 주장, 아내의 주장. 그런데 그 주장들이 서로 부딪칩니다. 부딪치면 불꽃이 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싸움이 없으려면 같은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신혼부부들이 무척 많이 싸우는데,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우리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 맞춰가는 과정을 그냥 내버려 두고, 같은 사랑을 가지도록 도와주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것이 어떻게 해결되었다고 생각합니까? 한쪽이 포기해버립니다. 그냥 굴종해버립니다. 흡수해버립니다. 그것을 우리는 흡수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너무 강하니까, 내 남편이, 저 사람이 너무 세니까, 내가 내 주장을 해봐야 싸우기만 하니까. 그래서 30년을 참고 사는 것입니다. 서른에 결혼해서 60까지 참고 살다가, 남편이 은퇴를 딱 하면 "자, 이제 당신의 연금과 내가 지금까지 조금씩 모아 놓은 돈을 내가 받고, 이제 우리는 졸혼합시다. 지금까지 내가 많이 참고 살았으니."
그렇게 해서 흡수된 사랑은 언젠가는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누가 너무 강하니까 거기에 그냥 숙여주고 포기해버리는 사랑을, 그것을 같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일단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해결된 것처럼 보이고, 안 싸우니까, 갈등이 없으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안 싸우면 문제없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에도 목소리 큰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 저 사람하고 괜히 대립해봐야 나만 속상하고 속 시끄러우니까" 하며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주변에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왜곡되고 왜곡되다가 터져버립니다.
그것을 문제 해결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같은 사랑이라는 것은 누구의 사랑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닙니다. 너의 사랑도 나의 사랑도 고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밑바닥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뒷받침된 사랑, 바탕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제가 된 사랑입니다. 그러면 흡수된 사랑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도 포기하고 너도 포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희생하고 내어주고 포기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나도 내 주장을 조금 포기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너도 너의 주장을 내려놓고 포기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서 희생하고 헌신하고 그 방향을 맞춰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 말씀이 중심이 되어서 그것을 향해서 성도들이 계속 수렴되어서 가는 과정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라는 기준이 없으면 목소리 큰 사람에게 흡수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격 급하고 세고 힘 있는 사람에게 흡수됩니다. 그것은 나중에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는 또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합니다. 겸손이 또 나옵니다. 우리가 여러 번 다루었기 때문에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남을 높이는 것입니다.
나를 낮추는 것은 겸양인데, 그것은 유교적이고 도덕적이고 동양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겸손이라고 배웠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위장할 수 있습니다. 포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을 높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칭찬하는 것, 남을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높여주는 것,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 9장 33절, 34절을 보면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니" 예수님이 모르고 물으셨을까요? 알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누가 크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항상 이것이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누가 크냐, 누가 크냐." 이것은 겸손이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크냐"는 관점으로, "누가 더 잘났냐"는 관점으로 접근하다 보면 자기의 장점만 부각시키면 됩니다. 자기가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섬겨서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내가 두드러지려면 남을 끌어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제자들이 "누가 크냐?" 서로 쟁론했다는 말은, 흠집을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상대에게 "야, 너는 세리였잖아. 넌 옛날에 돈 세던 세리였잖아. 너는 원래 사람들이 매국노라고 말했잖아." 그러면 "그러는 너는 뭘 배웠는데? 무식한 어부 주제에. 넌 가슴에 칼 가지고 다니는 주제에, 칼부터 치워라."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자꾸 남의 약점을 비방하고 깎아내리고, 자꾸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가 크냐?" 쟁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상대의 약점을 보고 공격하고, 상대의 약점을 웃음거리로 삼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한 사람을 가지고 바보 만들고. 그것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상대를 칭찬하고 높여주는 것, 그것이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교회 공동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