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특강 8 - 풍성한 연보 (고후 8-9장)

본문: 고린도후서 8장 1-2절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오늘은 고린도후서 공부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풍성한 연보"입니다. 옛날 우리 어른 세대들이 신앙생활하실 때는 "연보 드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은 연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헌금이라는 말을 쓰지만, 옛날에는 연보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연보라는 말이 상당히 정겨운데, 오늘은 이 풍성한 연보에 대해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7장의 주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습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는 아주 중요한 것,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회개입니다. 눈물이 있어야 되고, 그 눈물은 그냥 눈물로 그치면 안 되고 반드시 삶의 돌이킴으로, 열매로 나타나야 됩니다. 결국 그것은 영혼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어떻게 하면 영혼 구원을 행할까, 우리가 영혼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근심하고 고민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근심이 있는데 세상 근심입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세상 근심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는 근심이 곧 물질로 인한 근심 아니겠습니까? 물질로 인한 근심은 결국 자기를 찌른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찌르는 것은 결국 사망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근심 말고, 물질로 인한 근심은 접어두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해보자, 믿음의 사람들은 반드시 그 길을 걸어가 보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오늘 8장과 9장을 다루는데, 이제 우리가 물질과 영혼 구원 사이에서 무엇을 위해서 근심해야 되느냐, 즉 영혼 구원을 위해서 근심하자 하고 그다음 풍성한 연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논리적으로 연관이 좀 되지 않습니까? 풍성한 연보는 결국 내가 물질을 따라 살지 않겠습니다라는 결단의 표현입니다. 나의 관심과 나의 근심은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라는 것을 삶으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8장과 9장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의 실천편으로 이제 너희가 풍성한 연보를 한번 드려 보자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요즘 우리 현대 교회의 분위기는, 우리 교회를 포함해서 모든 교회의 분위기는, 헌금을 교회에서 공적으로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지 않습니까? 별로 덕스럽지 않다, 별로 은혜롭지 않다고 금기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대놓고 헌금하라고 얘기합니다. 연보를. 2천 년 전은 되고 지금은 안 되느냐? 그게 아니라 바울이 이렇게 강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연보 말씀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를 위해서는 한 푼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텐트메이커였습니다. 전도 열심히 했고, 그는 고린도 교회에 한 푼의 짐도 지우지 않았습니다. 나를 위해서 너희는 뭘 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를 위해서는 달라고 한 적이 없으나 구제를 위해서 연보는 하라고 교회들마다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게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역설적으로 헌금 설교를, 연보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없는 이유가 그동안 성도들이 많이 속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좀 더 대놓고 말하면, 교회에서 쓰는 줄 알고, 진짜 하나님 사역인 줄 알고 열심히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기에 상처를 받고 거기에 낙심하고, 교회가 성도들이 피땀 흘려 낸 연보를, 그 헌금을 가지고 엉뚱한 데 쓰니까 저항이 생기고 문제가 생겨서 이제는 말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걸 다시 복원시키려면, 다시 원위치시키려면 정직을 회복하면 됩니다. 헌금을 헌금답게 쓰면 됩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니까 하나님 앞에 제대로 공동체가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대로 공동체 합의를 따라 사용하면 됩니다. 그러면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런 데 물질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힘을 모아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게 원리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얘기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1.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

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바울 서신에서 마게도냐 교회라고 하면 그냥 우리 입에는 세 교회가 나와야 됩니다. 세 교회가 어느 교회입니까?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입니다.

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에게 바다를 중심으로 두고 우리가 지도에서 볼 때 오른쪽 즉 동쪽은 터키 지역입니다.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입니다. 에게 바다를 건너오면 서쪽 지역이 지금의 그리스 지역입니다. 그리스 지역의 북쪽 지역을 가리켜 마게도냐 지역이라고 부릅니다. 그 북쪽의 마게도냐 지역에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때 가서 개척한 교회가 세 교회입니다. 바울이 그래서 마게도냐라고 말할 때는 그 세 교회를 한꺼번에 일컫는 말입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1-1. 환난 속의 기쁨

이 세 교회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2절에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이 교회들이 환난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넘치는 기쁨, 기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극심한 가난이. 이 말이 되는지를 한번 보십시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즉 마게도냐 세 교회가 연보를 열심히 했습니다. 헌금을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 헌금을 하게 한 동력이 무엇이냐? 세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첫째 환난의 많은 시련, 둘째 그들의 넘치는 기쁨, 셋째 극심한 가난. 말이 됩니까? 논리적으로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됩니다. 말이 안 되는 말을 성경에 왜 써두었습니까? 바울같이 똑똑한 사람이, 그렇게 논리적인 사람이 이 말이 안 되는 말을 쓴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교회들이 마게도냐 지역 교회들이 환난의 시련을 겪었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특히 데살로니가 교회가 굉장한 핍박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거기에서 복음 전하다가 큰 고난을 당했습니다. 베뢰아로 갔는데 베뢰아에서도 데살로니가에서 온 사람들 때문에 복음 전하지 못하고 밤에 배 타고 아덴으로 내려간 것 우리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기쁨이 있었습니다. 또 그런데 그들은 현실적으로는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보통 가난했던 게 아니라 극심한 가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흘러넘치는 기쁨. 성도에게 있어서 흘러넘치는 기쁨이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기쁨이지요. 예수를 만난 기쁨이지요. 부활의 주님을 내가 영접한 기쁨. 내가 이 땅에서 눈 감아도 천국에서 눈 뜰 수 있다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기쁨, 그런 넘치는 기쁨이 그 교회 성도들에게 있었습니다. 그 기쁨이 있으니 그다음 나누고 베풀 때 생기는 기쁨이 또 생기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기쁨이, 하나님께서 나를 건지시고 구원하셨다는 그 기쁨이 환난의 시련도 극복하게 하고, 극심한 가난도 극복하게 해서, 나누고 베푸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는 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