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한이 차서 (누가복음 1:57-80)

곤충은 성장하기 위해 자신의 외골격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곤충의 탈피라고 부릅니다. 곤충이 탈피하기 위해서는 사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껍질을 벗고 몸이 부드러워지면 외부의 포식자들에게 쉽게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몸이 부드러워진 상태에서 숨어 지내며 몸이 딱딱해질 때까지 견뎌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발견되어 잡혀 먹힐 수도 있고,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탈피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나면 곤충은 한층 더 성장합니다. 몸집이 커집니다. 천적으로부터도 조금 더 자유롭습니다. 번식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행동 반경도 넓어집니다. 그래서 생존의 기간도 훨씬 더 길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곤충은 생명을 걸고 목숨을 다해 탈피를 위해 노력하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도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성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껍질을 깨는 과정, 성장하는 과정은 때로는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성장하고 발전해야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우리도 보람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신앙 성장의 여정은 십자가를 지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자기 부인을 해야 하는데, 여기서 자기 부인이라 함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평소의 경험과 지식과 상식을 뛰어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로는 힘이 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이 과정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이 영적 탈피의 과정을 훌륭하게 이루어내어 신앙 성장을 이룬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영적 성장의 탈피가 반드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사가랴는 성전에서 말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엘리사벳은 남편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열 달 동안 우리는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깊이 묵상하고 침묵하면서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여섯째 달이 되던 날 마리아가 찾아옵니다.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가 와서 깊고 깊은 교제를 나눕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통로로 쓰임받는다는 데서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1.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라

이제 마리아가 석 달 동안 함께 있다가 떠나갑니다. 엘리사벳의 출산이 임박했습니다. 이제 아기가 태어납니다. 57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해산할 기한이 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한이 차다'라는 동사의 원형으로 플레토(πλήθω)라는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플레토라는 동사의 뜻은 '하나님께서 부으셔서 충만하게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이 동사를 성경에서 또 어디에 쓰느냐 하면, 성령이 충만하다 할 때 이 동사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주셔서 흘러넘치게 된 상태, 이 충만하다 할 때 플레토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성령은 내가 부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내가 붓는다고 해서 성령이 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부어 주실 때 그때 성령이 가득해서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사람들이 볼 때는 엘리사벳의 배가 점점 불러와서 열 달이 되어 이제는 기한이 차서 출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겠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게 주신 은혜가 가득 차고 넘쳐서 이제 충만하게 되어 출산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기한이 이 가정에 가득 차고 충만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보는 것과 하나님의 시각이 전혀 다릅니다. 이 지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실패하고 실수하고 넘어지는 까닭이 때를 분별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다 생각하고 뚜껑을 열어보니 하나도 차 있지 않습니다. 내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내가 덤벼들었는데 사실 가득 차 있지 않습니다. 텅텅 비어 있습니다. 그때는 굉장히 당혹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득 채워서 흘러넘치게 되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인지, 언제 이때가 가득 찼는지 모르고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것도 당황스럽습니다.

1-1. 내 때와 하나님의 때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요한복음 7장 2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 말은 예수님의 동생들이 우리 주님께 하는 말입니다. 당신이 여기서 이렇게 이 좁은 시골에서 이런 일을 하지 마시고 이제는 예루살렘에 가십시오. 서울에 가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능력을 행하시면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줄 것 아닙니까?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 사건이 있었습니다. 벳새다 들판,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벳새다 들판에서 수많은 무리들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지 않았습니까? 이런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왜 이 시골 구석에서 하시는 겁니까? 이것을 예루살렘에 가서 하시면 당신이 일약 스타가 될 텐데, 그러면 형님이 스타가 되면 우리 동생들도 형님의 덕을 좀 보고 살 것 아닙니까? 이제 때가 찼습니다. 여기서 제발 이러지 마시고 예루살렘으로 가 주십시오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이런 동생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거니와 나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도래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플레토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가득 찬 것처럼 보이나 아직 하나님의 때에 뚜껑을 열어보면 하나도 차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예수님이 초막절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에 올라가셔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보는 것과 예수님이 보는 것이 이처럼 다릅니다.

1-2. 시각을 바꾸라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우리 스스로에게 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언제가 하나님의 때인가? 내 때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때는 무엇인가? 나는 그토록 하나님의 때를 갈망하는데 하나님의 때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굉장히 어려운 것 같지만 의외로 어렵지 않습니다. 시각을 바꾸면 됩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나의 시간을 들여다보시면 됩니다.

자, 우리의 일주일의 시간이 있습니다. 월화수목금토일, 일주일의 시간들. 우리는 항상 자기 시각에서 나의 시간을 봅니다. 그러면 내가 일주일을 사는 이 시간 가운데 가장 소중한 시간이 언제입니까? 내가 쓰는 시간 가운데 절대로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시간이 있습니다. 시간의 우선순위, 선후 좌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리스트업이 되고 우리는 그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내가 원하는 중요도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시각을 한번 바꿔서 하나님께서 내 시간의 월화수목금토일을 보시고,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길 만한 시간이 언제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아마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취미 생활을 하는 것, 내 오락을 하는 것, 나의 육체적 쾌락과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시간을 쓰는 그 시간을 하나님이 우선순위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우선으로 생각하시는 시간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만나는 영적 교제의 시간일 것입니다. 하루에 가장 중요한 시간을 하나님과 우리가 나누는 시간, 하나님이 그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주일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친밀한 영적 교제와 예배 드리는 시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나의 죄악과 나의 무능과 나의 탐욕을 바라보는 이 시간, 하나님은 그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때가 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시간 가운데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될 시간이 언제인지, 내가 절제해야 될 시간이 언제인지가 분명히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 항상 자기 기준으로 내 시간을 보면 이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때를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부모 된 입장에서 자식들이 시간 쓰는 것을 우리가 보는 관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부모가 자녀들 시간 쓰는 것을 보면 다 마음에 드십니까? 화가 나지 않습니까? 기분 나쁘지 않습니까? "너 이런 식으로 시간을 쓰다가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너는 나이가 지금 몇 살인데 아직까지도 시간 관리를 이따위로 하느냐?" 부모가 보면 지금 이때 우리 아이가 이렇게 시간을 쓰면 안 되는 것이 뻔히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잔소리를 듣는 아이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나 좀 내버려 둬라" "나도 나름대로 계획하고 내가 원하는 시간이 있다"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싸우기 싫어서 갈등하기 싫어서 그냥 두는 것이지, 시간이 한참 더 지나면 분명히 우리 아이들은 후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의 선후 우선순위를 보시면 얼마나 한심하겠습니까?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려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의 시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서 5장 15절과 1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때가 악하다고 했습니다. '세월을 아끼다', 헬라 원문에 보면 '기회를 사라'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기회를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의 시간을 보면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시간이 딱 보입니다. 그러면 그 시간을 위해서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라는 뜻입니다. 영적 각성의 시간을 위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개인 묵상의 시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교제의 시간을 위해서 쓸데없는 여타의 시간들을 거기에 투자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기회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 기뻐하시는 기회를 사야 우리는 시간의 관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탈피의 가장 중요한 시간의 관리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어떻게 사셨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내가 원하는 시간을 내 주장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때를 알려 주십시오. 하나님의 때가 언제입니까?"라고 묻는데, 하나님도 답답하고 하나님도 한심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시간의 기준에 매여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때를 알겠습니까? 알려 준다고 그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 영적 껍질을 깨뜨리고 탈피하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시간을 재정돈하십시오. 다시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펴보시면 정리해야 될 것들이 보일 것입니다. 버려야 될 것, 정리해야 될 것, 우선순위를 재정렬해야 될 것들을 살피시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시간의 관리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말씀으로 돌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