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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3일 오후 2:12 (GMT+9)

'제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시대의 개막이 연일 회자하는 지금, 인류는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알파고의 시대,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시대적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999년 상영된 영화 <매트릭스>(릴리 워쇼스키, 라나 눠쇼스키 감독)는 인공지능이 '매트릭스'라는 공간에서 사람의 의식을 통제하고 사람은 기계의 생존을 위한 새로운 에너지 자원으로 이용되는 충격적인 미래상을 보여 준 바 있다. 매트릭스(matrix)는 라틴어 어머니(mater)와 자궁(-ix)의 합성어로 '모체'이며, 수학과 컴퓨터에서 말하는 행렬(行列)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 매트릭스는 개별 사람이 믿고 싶어 하는 현실에 포획된 일종의 보호막인 '모체'와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세상과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는 인식 과정에 포함된 분별심을 컴퓨터 행렬로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자본과 언론이 앞장서서 최첨단 기계와 인공지능이 만들어 주는 신세계를 찬송하고 있다. 동시에 '기계가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고 있다', '사람의 직업뿐 아니라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각종 문명과 문화가 기계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살아 있는 뼈와 살과 세포와 정신으로 구성된 온전한 나가 아닌 기계 부품으로 전락한 삶이 도래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 역시 커지고 있다. 인공지능이 대세가 되는 지금이 아닌 무려 40년 전 이 문제를 전면으로 제기한 만화영화가 있었다. 마츠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 999>(1977)다. 이 만화영화는 1980~90년대를 살았던 지금의 중년 세대에게 우주적 상상력과 사람다움, 시간, 영생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물론 그것은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 중년의 삶을 살아 내면서 마츠모토 레이지의 미래를 읽는 눈에 공감할 때 가능한 것이다.

▲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 중 한 장면. ⓒgoole.com

▲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 중 한 장면. ⓒgoole.com

<은하철도 999>는 영원한 생명(영생), 기계의 몸을 얻기 위한 철이와 메텔의 여행기이자 엄마 잃은 소년 철이의 성장 기록이다. 서기 2221년을 배경으로 한 이 만화영화는 슬픈 눈빛, 허리까지 내려오는 찰랑찰랑 윤기 나는 금발, 가녀린 몸매, 검은 모자와 검은 옷을 입은 메텔과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망토를 두른 작지만 신념에 찬 눈빛을 가진 철이가 정거장(행성)을 하나씩 거치면서 시간과 영생의 의미를 깨우쳐 나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마츠모토 레이지는 철이의 길벗인 메텔을 "청춘의 상징이자 소년의 욕망이며 엄마와 같은 자기 안의 환영"이라고 정의한다.

이 만화영화는 기계 백작에게 죽임을 당한 엄마, 그 엄마를 대신해 기계 인간이 돼 영원한 생을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난 철이와 그의 조력자 메텔이 다양한 존재와 만나면서 세계와 사람을 보는 관점이 변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은하철도 999>는 결국 '메텔의 이야기이자 철이의 사람다움을 찾아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와 <은하철도 999>의 메텔(maetel)은 라틴어로 어머니(mater)라는 뜻이지만, <매트릭스>의 인공지능보다 메텔이 훨씬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메텔의 슬픈 눈빛과 검은 옷은 여행 중 많은 생명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상징한다.

마츠모토 레이지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한정된 삶 덕분에 더욱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인간적인 삶이다. <은하철도 999>는 영생(기계화된 몸)에 대한 인간 군상의 욕망을 보여 준다. 나아가 영생을 얻지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기계 인간들을 통해서 유한한 삶을 긍정하고, 그 시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츠모토 레이지는 만약 사람이 "영생을 산다면 대충대충 살 것"이라며 "시간은 꿈을 배반하지 않고 꿈도 시간을 배신하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시간과 꿈을 배반하지 않는 삶, 사람다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분별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누고 쪼개고 분리하고 분석하는 분별심, 매트릭스 모체 안에서 컴퓨터 행렬로 적용되는 분별심이 아닌 무엇이 귀중한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분별심이 아닐까! 말하자면 분별심은 자동차, 아파트, 다이아몬드와 쌀, 공기, 물 중 어떤 것이 귀중한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전자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후자는 없으면 결코 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임을 깨닫는 것이 사람다움이 아닐까!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작동하고 있다. 자동차, 아파트, 다이아몬드를 욕망하는 역설적인 삶, 이것은 사람다움이 아니다.

사람다움은 조화로운 삶, 협동의 삶이다.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삶'을 '사람'의 준말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람다움'은 연식(나이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사색의 갈무리라고도 했다. 올바른 분별심을 갖는 공부(工夫, 사람이 도구를 가지고 있는 모양)가 은유(농사짓고 사는 삶)하는 것은 결국, 계절과 자연의 변화, 자연과 사람의 조화,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맺기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아닐까!

'사람다움', 서양의 무슨 무슨 사상(가)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해월 최시형 선생이 말씀하신 삼경(경천•경인•경물)사상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하늘과 땅과 세상의 돌이나 풀이나 벌레나 모두가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게 없다(천지만물막비시천주야天地萬物 莫非侍天主也)"는 마음가짐과 실천으로부터 사람다움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해월의 시천주 사상을 삶으로 체현하고자 했던 장일순 선생은 일찍이 접화군생(接化群生)을 강조한 바 있다. 선생은 "모든 문제가 생명 속에 하나둘 살아나는 것이므로 전체를 모시고 가는 하나의 생활 태도로 '함께 사는 관계'를 키워 가는 자세, 즉 만물을 다 껴안고 살리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삶"이 진정한 사람다움이라고 했다. 문을 열고 아래로 흘러가는 물(개문류하 開門流下)처럼 사는 삶, 만물을 먹이고 기르되 낮은 곳에 임하고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삶,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다투지 않는 삶이 사람다운 삶이라는 것이다.

마츠모토 레이지가 말한 시간을 배반하지 않는 꿈, 꿈을 배반하지 않는 시간은 작지만 하늘과 소통하고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고 꿈일 게다. 이와 반대로 화폐, 무기(핵), 힘, 성장과 발전의 신화는 기계화된 사람의 회색빛 욕망이다. "돈을 모시지 말고 생명을 모시고, 쇠 물레를 섬기지 말고 흙을 섬기며, 눈에 보이는 겉껍데기를 모시지 말고 그 속에 들어 알짜로 값진 것을 모시고 섬길 때만이 마침내 새로운 누리가 열릴 수 있다"는 장일순 선생의 말씀이 삶으로 스며드는 것, 그것이 철이가 깨달은 사람다움이 아니었을까!

▲ 영화 <설국열차> 스틸컷.

▲ 영화 <설국열차> 스틸컷.

우리 시대 힘차게 달리는 두 개의 열차가 있다. 마츠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 999>가 기계제국에 대한 욕망을 상징한다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2013년)는 자연의 순환 질서를 왜곡한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두 열차는 반(反)생명, 비인간화(지배와 개조의 욕망)의 모순과 위험, 그리고 이원론적 세계관과 화폐의 물신화를 엔진 삼아 지금도 폭주하고 있다.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 철이가 기계화 제국의 숭배자이자 메텔의 어머니인 프로메슘과 괴물이 되어 버린 기계제국을 거부하고 다시 여행길에 올라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더디게 흐르는 삶(시간), 느리게 스미는 관계(꿈)'에 숨겨진 깊은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제 폭주 기관차에서 내려 천천히 걸으며 꿈(희망)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 꿈(희망)은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꿈, 소유와 힘의 논리, 경쟁과 지배의 논리로 살아온 왜곡된 자기 사랑의 삶을 참회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