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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죽이는 꿈을 꿨다. 꿈이지만 당연히 섬뜩했고, 꿈에 잠겨 있는 내내 불안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때 뜬금없이 재수학원에서 알게 된 형이(!) 꿈에 나와 조언을 해줬는데, 재수할 때도 좋은 말을 자주 해주던 형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형의 기억을 침침하게 떠올리며, 일어나자마자 실로 오랜만에 카톡을 드렸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어른이 되길 갈망했다. 나이 먹고, 수염 나고, 키만 크면 되는 그런 어른 말고, “진짜 어른”. <삼진그룹영어토익반>에서 “어제의 너보다 오늘 더 성장했어”라는 칭찬을 서슴없이 하는 반은경 부장이나, <킹스맨> 콜린 퍼스나 <마블 시리즈>의 닉 퓨리처럼. 자기 필드에서 능하고, 값진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스타일리쉬하기까지한 그런 까리한 어른이 되고 싶었고, 되고 싶다. 참고로 나에게 어릴적 최고의 칭찬은, 어른같다는 말이었다.

재수학원을 경유한 뒤에야 대학이 받아준 터라, 내 주위엔 필연적으로 많은 형들이 있었다. 장남에, 사촌도 나와 동갑이라 주변에 형이 없던 나는 기껏해야 한두살 많은 그들에게 “진짜 어른”의 모습을 투영했고, 그들을 붙잡고 오만 얘기를 뱉어댔다. 돌아오는 조언 중 쓸모 있는건 몇 없었지만, 연애에서만큼은 맥킨지급인 그들의 컨설팅엔 감동했고, ‘나도 그랬다’ 류의 진부한 공감 멘트엔 속이 조금은 시원해졌으며, 술 먹다 근처 편의점에서 사주는 초코에몽엔 기립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난 개같아도 살아볼만한 다음날을 소주 몇 병 값으로 사곤 했다.

그래서인가, 진로, 공부 등의 힘들고 껄끄러운 얘기는 같은 속도로 머리가 굵어지는 친구들보다는, 형들에게 의존하는 구석이 생겼다. 이젠 친구들도 억지로 시간을 내야 만날 수 있고, 다들 불확실한 시기니 섣불리 힘든 얘기를 꺼내기 어렵지만, 형들에게 그런 얘기를 할 땐 괜히 편하다. 형들과는 그런 대화를 밤새 진탕 했더라도, 다음날 일어난 그들에겐 내 이야기가 주된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비혼을 주장하거나, 수능을 다시 치겠다고 난동을 피우면 술자리에선 경청과 조언에 진심이지만, 다음날엔 좆도 신경 안쓴다. 그런 쿨함과 클라이언트를 편하게 만드는 능력 역시 “진짜 어른”의 필수 소양이다.

최근 에스크, 디엠 등으로 어른스럽다는 말을 꽤 많이 듣는다. 주위 사람들이 들으면 ㄹㅇ기가 찰 거다. 내가 어른스럽나? 요즘 중학교 친구들과 항상 정신 연령은 그대로인데,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었다 한탄한다. 아니면 내가 어른의 기준을 너무 높게 잡아, 스스로를 기준 미달이라 치부하나? 아니다. 으레 어른이라면 쿨하고, 일에 능하며, 꼰대같지 않은 면이 있어야 한다. 난 여전히 돈 얘기엔 쿨하지 못하고, 일은 시작도 못 했고, 조언을 조심스레 포장만 할 줄 알지 꼰대같을까봐 항상 걱정한다.

나는 매년 매월, “진짜 어른” 능력치를 찍기 위해 버킷 리스트를 짠다. 올해 메인 테마인 ‘발전’ 역시 찐어른이 되기 위한 발버둥이다. 작년부터 “원하는 것 다 이루는 한 해 만들자” 란 말을 축하 혹은 인사말에 항상 곁들인다. 나와 내가 축전을 전한 그들 모두 원하는 것 다 이루는 한 해 만들고, 그렇게 존나 멋있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