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바람처럼 물처럼 e-레터를 배달하는 이야기 수집가, 훈훈입니다. <바람과 물>에서는 생명애 콜로퀴움을 통해 전환에 관한 각계 전문가들의 발표와 토론의 장을 펼치고, 그 내용을 싣고 있습니다. 이번 6호에 실린 콜로퀴움은 녹색전환과 기후정치가 주제였습니다. 언젠가 저도 생명애 콜로퀴움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토론자 중 누군가가 던진 물음이 한 동안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에코 파시즘이나 기후 권위주의를 불러오자는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생태전환의 당위와 내용도 중요하지만 방법론에 관해서 회의적인 민의(民意)에 답하지 못하면 안된다는 절박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이되, 어떤 민주주의여야 하는가가 더 적합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제 고민 중 하나였던 그 질문에 이번 <바람과 물> 6호에 실린 콜로퀴움이 답하고 있습니다. 오늘 바람처럼 물처럼에서는 생명애 콜로퀴움의 발표내용을 바탕으로 전환을 위한 민주주의를 주제로 이야기합니다. 바람처럼 물처럼 7호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약속된 날짜보다 늦게 발행된 죄송스러운 마음을 덧붙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가치판단을 하며 살아간다. 오늘 아침 내 밥상에 무엇을 올릴지 결정할 때도, 출근길에 자차를 이용할지 대중교통을 이용할지 결정할 때에도, 갑자기 생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할 때에도, 커피를 마시기 위해 텀블러를 쓸지 종이컵을 쓸지 선택할 때에도, 그밖에도 일상은 의식하지 못하는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가치를 우선하며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의식하지 않으면 일상에 휩쓸려 사는대로 살아가게 된다. 당연한 얘기다. 나에게 민주주의란 어떤 가치를 선택할지 충분히 숙고할 수 있는 시간과 정보가 주어지고, 스스로의 가치기준에 의해 선택하고, 행한 뒤 그 책임을 다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중고등학생들과 2박 3일 인문학 캠프를 진행한 적 있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그들이 평소와는 다른 삶의 리듬으로 살아내고, 다르게 생각하며 '별의 시간'을 경험하기를 바랬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감한 단절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 중 가장 큰 단절은 핸드폰과 연결된 일상이었다. 캠프를 시작하면서 그들에게 핸드폰을 사용하지 말자고 제안했다. 핸드폰이 우리의 시간을 어떻게 방해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동의를 구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들은 마지못해 동의했고, 핸드폰은 큰 케이스에 담겨져 반납되었다. 그리고 1일차 활동이 시작되었다. 핸드폰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신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틈틈이 생겨난 정해지지 않은 시간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곧잘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알아가는 즐거움으로 핸드폰의 빈자리를 채워나갔다.

사건은 밤에 일어났다. 방마다 모여서 핸드폰을 수거한 일에 대한 불평이 터져나왔다. "우리에게는 인권도 없느냐" "우리를 스스로 조절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여긴다", 심지어 "폭력적이다" "독재다"는 얘기까지. 아이들의 거침없는 말들을 전해 들은 나는 그날 밤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그들이 그렇게 느낀다면 분명 잘못된 것인터, 무엇이 문제였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밤새 고민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다같이 모여 앉았다. 예정에도 없던 시간이 시작되었다. 어제 하루, 핸드폰 없이 생활해 본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좋았던 점 한 가지, 불편했던 점 한가지씩을 발표하기로 했다. 물론 불편한 점은 천 가지쯤 되고, 좋았던 점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꼭 한 가지씩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모든 아이들이 발언의 기회를 가졌다. 하루가 길어서 좋았고, 조용히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고, 친구들과 눈 맞추며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고, 주변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반면 심심해서 싫었고, 친구들과 연락할 수 없어서 힘들었고, 음악을 들을 수 없어서 답답했고,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냥 불안했다고도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은 후 캠프 중 핸드폰을 사용할지 말지의 선택은 방금 우리가 말했던 좋았던 점과 불편했던 점 중 어떤 가치를 우선하여 선택하는가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충분히 고민한 뒤 각자 자신에게 맞는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따라 오늘 하루 어떻게 생활할지 계획을 세워보자고 제안했다. 선택은 끝났다. 단 한 명의 아이를 제외하고 모두 핸드폰을 되찾아 갔고, 핸드폰을 사용하면 벌어질 수 있다고 여겼던 내가 우려한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체주의는 사회를 일치된 의견으로 이끌 때 장점이 발휘된다. 권위주의는 다른 가치를 희생하고 빠르게 성장하자는 합의를 종용할 때 힘을 갖는다. 민주주의는 다르다. 합의는 사전에 주어질 수 없으며, 적법한 정치과정과 이해당사자들과의 조정을 거쳐 형성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과 이해관계가 자유로운 의사로 표출되어야 하고, 충분한 심의와 숙의는 물론, 조정과 타협의 긴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전제 위에 서 있는 체제가 민주주의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은 기후정치 담론에서 논의되고 있는 쟁점과는 다소 다르다. 이번 생명애 콜로퀴움에서도 보여진 바 기후생태위기 앞에 민주주의의 자기반성과 변화가 요구되고 있고,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어떤 민주주의를 할 것인가가 주된 쟁점이다. 두 발제자 가운데 박상훈(정치발전소 학교장)은 '느린 민주주의'를 제안했고, 하승수(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는 '깊은 민주주의'를 제안한다. 박상훈은 정치의 역할을 시민들의 요구를 모아내는 매개자로서 충분하고 바람직하며,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서는 약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느린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승수는 민주주의는 자기통치이며,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완할 수 있는 숙의민주주의, 마을자치 등 깊은 민주주의를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두 사람의 발제 모두 기후정치는 민주주의여야 하며 민주주의가 달라져야 한다는데에서 큰 합의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이 겪는 많은 문제들은 자치권의 결여에서 비롯되고 있다. 삶의 현장에 있는 주권자들이 아니라 기득권 엘리트들이 너무 많은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소위 중앙의 정치인, 관료 그리고 그들과 연결된 자본과 기득권 언론 등이 너무 많은 의사결정권을 휘두르고 있다. 정작 주권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통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이상은 짓밟히고 있다. 또한 이런 식의 중앙집권적 체제는 기후위기 대응도 어렵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