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이레

본문: 창세기 22:13-24

1862년 철종 13년, 조선 말기에 전례 없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경상도 19개 고을, 전라도 38개 고을, 충청도 11개 고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민란이 부분적으로 발생하기는 했지만, 이처럼 전국에서 한꺼번에 일어난 것은 조선 개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철종과 조정은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원인을 살펴보니 삼정의 문란 때문이었습니다. 전정, 군정, 환곡—결국 토지세와 군역과 환곡에 대한 세금 문제 때문에 조세 저항이 전국적인 민란으로 번진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직접 사안을 살피게 했습니다. 그해 6월에는 전국의 유생들에게 대책 마련을 위한 시험을 치르게 했습니다. 시험 문제를 철종이 직접 출제했는데, 그 내용 중 하나가 이러했습니다. "인재는 예전만 같지 못하고 재력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책이 없다는 뜻입니다. 인재도 예전만큼 뛰어난 사람이 없고, 왕실과 조정에 정해진 비용은 나갈 곳이 다 정해져 있는데, 백성들이 세금을 이전처럼 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문을 받고 전국의 유생들이 저마다 답을 쓰는 가운데, 김윤식이라는 분이 제출한 답안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글을 올렸습니다. 첫째, 군주의 의지가 문제입니다. 전정만 해도 그렇습니다. 토지세를 내는 사람을 살펴보면 민초들밖에 없습니다. 공신이라고 빠지고, 왕실의 외척이라고 빠지고, 양반이라고 세금을 면제받으니, 결국 민초들만 세금을 내는데 어찌 민란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둘째, 인재가 없다고 하셨는데, 전국에 사사로운 이익에 좌우되지 않는 인재가 넘쳐납니다. 문제는 그 인재를 조정이 등용할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양반들과 기득권 세력이 철저하게 포진해 있어서, 뛰어나고 실력 있는 인재들을 등용하면 그들의 이권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셋째, 왕실의 의지가 없습니다. 과거 영조 임금은 전국에 기근이 찾아왔을 때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왕실이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의지가 없습니다. 예산을 줄이지 않고,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백성들에게만 고통을 감내하라 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입니다.

김윤식의 의견이 채택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나 그가 끌려가서 곤장을 맞거나 죽지 않았으면 다행입니다. 결국 답은 뻔하게 정해져 있는데,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길까지 걸어가지 않습니다. 그 개혁의 길까지 걸어가면 병든 나라가 살아날 것인데, 누구도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길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답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길까지 가기가 그토록 힘겹습니다. 혜택은 누리고 싶고 하나님의 은혜는 받고 싶은데, 섬기고 일하고 주의 마음에 합하게 봉사하는 것은 그처럼 어렵습니다.

이삭을 드린 예배

오늘 본문은 여호와 이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이레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가는 자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 하나님께서 정하신 정상까지 도착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결박합니다. 신앙생활 40년 만에 비로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아노라"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그다음 일어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창 22:13)

한 숫양이 수풀에 뿔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숫양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드린 것은 양이었습니까, 이삭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받으신 것은 양 한 마리였습니까, 이삭이었습니까?

보이는 것은 아브라함이 양을 드린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과거에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께 드렸을 때처럼,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드린 이 양은 그냥 한 마리 양이 아니라 이삭이었습니다. 자기의 전 존재였고, 자신의 전체였고, 자기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을 드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과거의 아브라함이 40년 동안 믿음생활하면서 수백 마리 수천 마리 양을 잡아 드린 그 예배와 동일해 보입니다. 그런데 받으시는 하나님은 양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이삭을 받으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삭을—하나님은 이러한 예배를 이렇게 드리기를 바라고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1시간을 봉사하고 1시간을 섬기는데, 액면가로는 1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1시간이 그냥 쓰다 남은 1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지, 아니면 내 인생의 이삭 같은 존귀하고 소중한 한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지—그것은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아십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그냥 똑같은 동일한 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음생활하면서 헌금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헌금생활 열심히 하고 얼마나 많이 드렸습니까? 그런데 그 헌금이 이삭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까? 가장 귀한 이삭. 똑같은 액면가, 똑같은 금액, 똑같은 물질인데, 하나님은 이삭 같은 물질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과부의 두 렙돈이 바로 이삭 같은 예물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받기를 원하셨고,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예배의 모범입니다. 우리가 정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따르고 있다면,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가고 그 믿음의 여정과 예배의 모습을 배워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 이레로 가는 길

이제 이렇게 아브라함이 예배드리고 나서 하나님께 신앙 고백을 올려 드립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