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22:9-12
미국에서는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기념일로 지킵니다. 미국 전역이 공휴일입니다. 그만큼 킹 목사의 영향력이 오늘날까지 상당합니다. 킹 목사는 1929년 미국에서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침례교 목사가 됩니다. 그러나 이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1955년 어느 날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한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됩니다. 전 미국이 들끓었습니다. 흑인들이 곳곳에서 시위했습니다. 이 시위를 비폭력으로 이끈 사람이 바로 킹 목사였습니다.
킹 목사는 시위를 비폭력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버스 보이콧 운동을 주도하고, 동시에 버스 내 인종분리법이 위헌이라는 사실을 전 국민에게 알리며 연방 법원에 위헌 판결을 제소했습니다. 결국 이 법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끌어냅니다. 미국인의 승리였고, 흑인의 승리였고, 킹 목사의 승리였습니다. 이때부터 이분은 흑인 인권 운동가의 길을 걸어가는데, 1963년 워싱턴 DC에서 20만 명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기념비적인 연설이었습니다. 그 이듬해 1964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68년 어느 날 백인 우월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그러나 킹 목사가 남긴 유산은 분명했습니다. 법을 개정한 것입니다. 흑인이나 백인이나 여러 유색 인종이나 차별받지 않는다는 것,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확립했습니다.
그러나 법이 개정되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고, 여전히 분리가 존재하고,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었습니다. 그로부터 시작해서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2023년 12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처음으로 흑인 그것도 여성이 총장 인준을 받습니다. 하버드 대학은 1636년에 개교한 이래로 흑인 총장이 단 한 명도 배출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흑인이, 그것도 여성이, 아이티 이민자 출신인 클로딘 게이라는 52세의 여성이 총장이 되었습니다. 만약 킹 목사가 살아 있었다면 "이제야 우리 흑인들도 대학 총장이 되는구나"라고 감회가 깊지 않았겠습니까?
이처럼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시간차가 있습니다. 법이 이상이라면, 법이 현실이 될 때까지, 각 사람의 마음에 뿌리내리고, 우리가 자연스럽게 법을 받아들일 때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 시간차를 얼마나 어떻게 줄이느냐가 관건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칭의(稱義)의 차원에서 의로움을 허락하시는데, 그 의로움이 나의 의로움이 될 때까지, 내 삶이 의로운 삶으로 바뀔 때까지는 시간차가 존재합니다. 그 시간차를 줄이는 것이 우리 믿음 성공의 관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공한 인생입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이런 칭찬을 받게 되었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이 정한 모리아 산 그곳까지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창 22:9-10)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인신 제사로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것을 알기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결박할 때까지, 손에 칼을 잡을 때까지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셨습니다.
만약 이랬으면 어땠을까요?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 정해진 곳까지 갔을 때, 하나님이 "수고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지? 고생했다. 이삭은 저기 가서 쉬고 있고, 내가 양 한 마리를 준비했으니 아브라함 너는 양을 잡아 번제로 드려라." 모두가 해피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결박할 때까지, 손에 칼을 들 때까지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속뜻이 있습니다.
원래 아브라함은 예배의 사람입니다. 예배를 좋아하고 예배를 잘 드린 인물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니" (창 12:7-8)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부터 예배 드렸습니다. 옮겨가는 곳마다 예배 드렸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지금 여기까지 올 때까지 아브라함이 과연 몇 번이나 예배 드렸을까요? 수천 번 혹은 그 이상입니다. 그가 예배 드릴 때마다 하나님께 바친 양이 몇 마리나 되었을까요? 수백 마리, 수천 마리 혹은 그 이상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드린 그 엄청나게 많은 수의 예배와 지금 이 한 번의 예배, 그 무게가 어디로 기웁니까? 어느 예배가 아브라함에게는 기억에 남을 만한 어려운 예배입니까? 진땀 나는 예배입니까? 고통스러운 예배, 가슴 아픈 예배입니까?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드린 예배는 양을 드린 예배입니다. 자기 가정에서 키운 양 한 마리 바친 예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양을 드린 예배였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뒤로 감추어 두고 있으나 마나 한 양 한 마리씩 하나님께 드린 예배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예배가 특별한 이유는 자기 인생의 전부라고 말할 만큼 소중한 아들 이삭을 하나님 앞에 결박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힘겨웠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과정도 어려웠습니다. 브엘세바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으로 왔습니다. 산 아래에서 산꼭대기까지 올라오는 과정도 힘겨웠습니다. 올라와서 아들을 결박했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린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예배를 이렇게 드리라고 내버려 두신 이유는, 진짜 예배는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임을 알려 주려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자기 가장 소중한 것을 단 한 번이라도 드린 적이 있었습니까? 수천 번 예배 드려도 소중한 것은 뒤에 감추어 두고 별로 소중하지 않은 것만 하나님께 드렸는데, 그것은 자기 만족이지 진짜 예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믿음의 조상이 되려면, 앞으로 오고 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브라함을 보고 예배를 배워야 하는데, 예배가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려면 단 한 번 예배 드려도, 일생에 단 한 번의 예배가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진짜 예배임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 기독교는 공인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이 말은 네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라는 뜻입니다. 네 입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라. 네가 가는 발과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네가 예수 믿는 사람임을 입증하라.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너의 몸,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묶었던 것처럼, 너의 몸, 가장 소중한 것을 예배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이나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묶어서 번제로 내놓은 것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는데 어떤 마음으로 나와 있습니까? 내 일생에 단 한 번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심정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시간과 열정과 물질을 그저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까? 한번 예배 드려도 하나님은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을 진짜 예배라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