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

본문: 창세기 22:3-4

최근 서울 행정법원에서 한 의미 있는 판결문이 나왔습니다. 판결문의 마지막 결론은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는 문장이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이 문장을 법조계에서는 결코 평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판사가 쓰는 판결문은 주어와 서술어, 목적어를 분명하게 기술해야 하고, 형용사와 부사를 최대한 자제하며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작성해야 합니다. 게다가 법률 용어가 난무하여 도대체 누가 잘했다는 것인지, 결론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누가 잘못했다는 것인지 판결문만 읽어서는 알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대체적인 판결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번 판결문은 내용이 쉽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 소송을 제기한 분이 청각 장애인이었습니다. 이분이 자기 취업 과정에서 청각 장애인으로 불이익을 받았다는 취지의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의 판단은 불이익이 없었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법정에서 판결문을 들어야 하는데 수어 통역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려운 법률 용어가 수어 통역에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쉬운 문장으로, 그림과 삽화까지 동원해서 판결문을 써 준 것입니다. 법조계 안팎과 국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법원이 변하고 있다는 하나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법조계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많이 잃어 오지 않았습니까? 정치 편향적인 판결도 있고, 국민들 눈높이에 맞지 않는 형량도 있습니다. 분명히 흉악범인데 형량이 너무 낮아서 "저 사람이 풀려나면 우리가 어떻게 불안해서 살 수 있을까?"라는 아우성도 군데군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법조계가 달라지는 계기가 될까라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어떤 조직이나 어떤 사람도 완벽하거나 완전할 수 없습니다. 불완전합니다. 그런데 완전하지 않으나 방향이 옳으면, 그 사람이 걸어가는 방향, 그 조직이 나아가는 방향이 옳으면 사람들은 응원해 줍니다. 기대감을 가집니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결과가 좋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속을 썩이기도 하고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그러나 좋은 방향으로 걸어가려고 애를 쓰면 인내해 주고 기다려 주고 도와줍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도우십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방향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다면,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죄짓기도 하고 허물이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기대해 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그 길을 걷고 있고,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기대하고 신뢰하고 믿어주고 계십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입증하라는 의미를 깨닫습니다. "지금 너에게 하나님 나는 몇 등쯤 되느냐, 지금 네 마음속에 이삭이 우상이 아니냐, 네 마음속에 하나님 나를 다시 중심에 세워라." 하나님의 음성이 바로 그런 의미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인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밤새도록 기도하면서 그 깊은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어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창 22:3)

여기에 반가운 한 구절을 만납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창세기 21장 14절에도 나왔던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떠나보내라 하실 때도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밤새도록 늘어지게 자고 푹 자고 아침에 기지개를 켜고 컨디션 좋게 일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밤새도록 고민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울부짖고 묻고, 눈도 한번 붙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아침에 일찍 결단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훌륭한 믿음을 보여주는 지표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오랫동안 고민합니다.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밤새도록 한잠도 자지 못합니다. 그런데 결단합니다. 결단한 이후에는 즉각 행동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래도 아침은 먹여서 보내야지" 하고 이스마엘에게, 이삭에게 아침을 먹이려고 그 자리에 앉아서 아들의 얼굴을 많이 쳐다보고 있었다면, 아들을 떠나보내지 못할 이유가 수십 가지나 생각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그날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날 못하면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결국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명령에는 순종하지 못하게 됩니다. 순종하지 못하고 결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짐을 꾸립니다. 그런 식으로 이스마엘도 떠나보내고, 그런 식으로 이삭도 함께 길을 재촉해서 길을 떠납니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기도하지만, 결단하면 즉각 행동하는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오래 고민합니다. 오래도록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단도 합니다. 그런데 이 결단이 내 손과 발로 옮겨지기가 어렵습니다. 오래 걸립니다. 어떤 분은 수년, 어떤 분은 수십 년, 어떤 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안 되는 분도 있습니다. 수백 번 결단하지만 그 행동 하나가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차이가 바로 나와 아브라함의 차이입니다.

떠나감과 떠나보냄

아브라함의 인생을 보면 믿음의 인생이라고 하는데, 그의 믿음을 드러내는 두 가지 키워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떠나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두 번 떠나게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합니다. 갈대아 우르는 아브라함에게는 우상의 땅이요, 죽음의 땅입니다. 자기 형제 하란이 거기서 죽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제들, 가족들이 함께 길을 나서서 하란으로 갑니다. 하란에 도착해 보았더니 그곳은 우연히도 죽은 형제 하란과 이름이 똑같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죽은 아들 하란에게 빠져 그 환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거기서 길을 떠나게 합니다.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두 번의 떠남에 순종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경제적 기반이 거기에 다 있습니다. 평생 동안 쌓은 것이 거기에 다 있고, 인간관계가 다 있고, 거래처가 다 있고, 앞으로 창출할 수익의 미래적인 가치도 거기에 다 녹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떠나서 처음부터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 부르심을 따라서 떠납니다.

두 번째 아브라함의 믿음을 나타내는 키워드는 떠나보냄입니다. 떠나가는 것보다 떠나보내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찮은 것을 떠나보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을 떠나보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이 떠나보내라고 합니다. 이스마엘이었고 이삭이었습니다. 아브라함 그 자체 아닙니까? 평생 동안 기다려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 100세가 되어서 낳은 아들 이삭, 자기 인생의 전 존재라고 할 만큼, 내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이들을 하나님은 떠나보내라고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신앙생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 제목들을 한번 쭉 적어 보십시오. 전부 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거 좀 가져가십시오" 하는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습니다. 물론 가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더러운 성질머리 좀 가져가십시오. 하나님 이 지긋지긋한 가난 좀 가져가십시오. 입만 열면 남을 저주하는 이 못된 말버릇 좀 가져가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도 달라고 하고, 물질도 권력도 사람도 관계도 다 채우려고 하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덜어내라고 한다면, 그것을 다 비워내라고 한다면, 신앙생활의 본질이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우는 것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동의하시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비우라고 한다면, 털어내라고 한다면.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이스마엘과 이삭을 덜어내라, 비워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