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22:1-2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1945년에 『동물농장』이라는 책을 발표했습니다. 이 책은 당시 소련의 스탈린 체제와 공산당을 비판한 작품입니다. 시간이 흘러 공산주의의 허무함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이 책은 지금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랑받고 있습니다. 책의 중심 내용은 이렇습니다. 원래 농장의 주인은 존스 씨 부부였는데, 동물들이 반란을 일으켜 주인을 내쫓습니다. 반란을 주도한 것은 돼지들이었고, 스노볼과 나폴레옹이라는 두 마리 돼지가 주동 인물이었습니다. 이들은 주인을 내쫓고 일곱 가지 강령도 만들었습니다. "두 다리로 걷는 것은 우리의 적이다. 네 다리로 걷는 것만이 평등하다." 그런데 문제는 스노볼과 나폴레옹 두 마리 돼지가 서로 권력투쟁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늘 아래 두 태양이 떠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두 돼지가 계속 싸웁니다. 결국 나폴레옹이 사냥개들을 동원해서 스노볼을 축출하고, 이에 반대하는 동물들도 함께 내쫓아 버립니다. 동물농장은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들어갑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조지 오웰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동물농장을 위해서 동물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존스 씨 부부가 땅을 사고, 수고하고, 농장을 만들고, 사료를 사고, 평생 동안 일해 왔습니다. 동물들은 그 농장에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동물들이 주인을 내쫓아 버렸습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동물들이 마치 농장의 주인인 것처럼 주객이 전도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과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조하실 때 아담과 하와는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거기에 살게 하셨습니다. 마음껏 먹고 마시고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담과 하와는 마치 에덴동산이 자기 것인 것처럼 행동하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때문에 한 가지 안전장치를 걸어 두셨습니다. 선악과였습니다. 선악과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에덴동산에서 너희들 마음대로 먹고 누리고 살아도 좋지만, 에덴동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것을 선악과 명령에 새겨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제거해 버립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제거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은 내 것이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다"라고 천명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으십니다. 결국 에덴동산에서 내쫓아 버리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많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하나님께 받은 것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것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는지, 그런 인생을 하나님이 어떻게 길들여 가시는지,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1)
"그 일 후에"라고 했는데, 그 일은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일은 한 개인 아브라함과 블레셋 민족이 조약을 맺은 사건입니다. 한 민족과 한 개인이 조약을 맺는 것은 격에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가만히 지켜보니, 한 민족과 한 개인이 조약을 맺어도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뒤에 계셔서 든든하게 지켜주시고, 아브라함이 하는 일마다 다 잘 됩니다. 지금 조약을 맺지 않으면 손해 볼 것 같습니다. 이 개인 아브라함과 블레셋이 조약을 맺어서 우리도 잘 되고 우리 후손들도 복을 받아야 되겠기에,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가서 조약을 맺자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맹세의 우물 브엘세바에서 조약을 맺습니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에게는 훈장 같은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 민족의 대표가 와서 자기에게 조약을 맺자고 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그에게는 위대한 역사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현장 교육이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의 일이 진행하고 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왜 부르셨을까요? 시험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시험하다"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낫사'(נָסָה)입니다. 이 시험하다라는 말은 **"입증하다", "증명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입증해 보여라, 증명해 보여라" 하고 말씀하시려고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무엇을 입증해야 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무엇을 보여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지금 너에게 나 하나님은 어디쯤 있느냐? 지금 너에게 하나님의 위치가 어디쯤 있느냐? 하나님이 너에게 있어서 우선순위냐, 아니면 차순위냐? 몇 등쯤 되느냐?" 하나님은 그것을 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가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런 식으로 시험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삿 3:1-2)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을 쫓아냅니다. 그런데 잔당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잔당들을 남겨두신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들을 쫓아내면 하나님이 우선순위인 것이고, 쫓아내지 못하면 하나님이 우선순위가 아니라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입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잘 통과하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우선순위임을 입증하는 것이고, 통과하지 못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가짜라는 것입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이 그냥 던져보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을 데리고 장난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은 잘 통과하면 하나님 백성들에게 유익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잔당들을 몰아내면 그들에게 유익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잘 통과해서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그의 믿음이 하나님께 높임 받는 것이니 유익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제 시험 문제가 출제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2)
시험 문제가 어떻습니까? 만약 아브라함이 되어서 이 문제를 받았다고 합시다. 어떤 마음일까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 않았겠습니까? 제3자인 우리가 이 문제를 지금 받아봐도 "아니, 하나님 이럴 것이었으면 왜 100세에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습니까? 75세에 그를 불러서 25년 동안이나 고생시키다가 100세에 아들을 주셔 놓고서는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도대체 이것이 하나님의 진심입니까? 하나님의 본심이라면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런 원망이, 이런 질문이 쏟아져 나오지 않습니까? 그 질문을 받았던 아브라함, 하나님의 이 요청을 받은 아브라함, 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여러모로 복잡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