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엘세바

본문: 창세기 21:22-34

우리나라가 최초로 외국과 맺은 근대적 조약은 1876년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입니다. 외형적으로는 국가 대 국가의 동등한 조약이었으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처참한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이 조약에는 크게 세 가지 핵심 조항이 담겨 있었습니다. 첫째, 조선은 부산, 인천, 원산을 즉각 개항해야 했습니다. 둘째, 개항한 지역 주변에서는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셋째, 일본은 조선에 신고하지 않고도 조선 연안 지역을 마음대로 측량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만약 조선이 그 당시 힘을 갖추고 있었다면 결코 이런 조약을 맺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패전국 독일과 승전국 연합군 사이에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패전국 독일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첫째, 독일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식민지를 100퍼센트 반환해야 했습니다. 둘째, 프랑스와 인접한 알자스-로렌 지역을 즉시 프랑스에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조항은 전쟁에 졌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셋째 조항인 전쟁 배상금의 규모가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1,320억 금 마르크를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규모인가 하면, 당시 독일 국민이 1년에 납부하는 세금이 약 60억 금 마르크였습니다. 그러니 독일 국민이 내는 세금을 22년 동안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오직 전쟁 배상금으로만 갚아야 완납할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금액을 어떻게 전쟁 배상금으로 내겠습니까? 만약 독일이 패전국이 아니었다면 그런 조약에 서명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국제관계는 철저하게 힘의 논리에 의해 좌우됩니다. 강력한 힘을 보유한 쪽이 갑의 위치에 서고, 힘이 없는 쪽은 형편없는 조약에도 서명해야 하는 을의 처지로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한 개인 아브라함과 한 민족 블레셋 사이에 맺어진 조약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 민족과 한 개인이 조약을 맺습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민족이 갑이 되고 개인이 을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반대입니다. 아브라함이 갑의 위치에 있고, 블레셋이 을의 위치에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이면에서 역사하신 놀라운 역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창 21:22)

아비멜렉은 블레셋 왕의 이름을 일컫는 대표 명사입니다. 블레셋 왕이 군대 장관 비골을 대동하고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일까요?

아비멜렉이 목격한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와 양떼, 소떼,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블레셋 지경 그랄 땅에 가서 목축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땅에 와서 오랜 기간 양과 소를 먹이니까, 세금을 원활하게 징수하기 위해 볼모를 하나 잡아 두었는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였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인 줄 모르고, 아브라함이 거짓말해서 그냥 누이인 줄 알고 볼모로 잡아둔 것입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로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인들의 태를 닫으셨습니다. 아비멜렉은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서 역사하시고 아브라함 편에 서 계심을 그때 깊이 깨달았습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낳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사람이 100세에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남자의 기력이 완전히 다 쇠진했고, 여자의 경수도 끊어졌는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그렇게 아들을 낳았다 하더라도 약해서 금방 죽을 줄 알았는데, 젖을 뗄 때까지 건강하고 무사히 살아남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정말 이 가정에 하나님께서 살아서 역사하시고 숨 쉬고 계시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와서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불신자들은 믿는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저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저 사람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나와 똑같은 상황인데 나는 이렇게 결론 내리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결정하고 살아가는지, 그 과정과 결과는 어떠한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믿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굉장히 많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2-3)

보디발 이야기입니다. 보디발이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보디발은 불신자인데 어떻게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신기하고 신비로운 일처럼 보이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놀랄 것도 아니고 신비로운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요셉의 삶이 보디발의 눈에 그렇게 보인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노예들은 거의 다 똑같습니다. 쉬는 것 좋아하고, 노는 것 좋아하고, 먹는 것 자는 것 다 좋아합니다. 정해진 시간만 일하려고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더 많은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종이고 노예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치 노예인데 주인처럼 일했습니다. 자기 일처럼 일했습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시키지 않은 일도 했습니다. 남들은 귀찮아 하는 일을 최선 다해서 일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면 안 되는 일을 요셉이 하니까 되었습니다. 그러니 보디발이 보기에 도대체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들여다봤더니 히브리 출신이고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니 다르게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는 일에 역사가 일어나니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불신자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십니까?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들이 눈여겨보는데 "아니 저 사람 신앙생활하고 저 사람 교회 다니는 것은 내가 아는데, 자세히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나랑 똑같습니다. 결정하는 것도 똑같고, 불평하는 것도 똑같고, 원망하는 것도 똑같고, 어려운 상황에 반응하는 것도 똑같고,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주일날 교회 가는 것만 다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분에게 어떤 귀감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을 지켜보는데 매사가 다르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경제적 상황을 사는데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실 것"이라 고백하고 힘차게 살아갑니다. 인색하지도 않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나누려 합니다. 다르게 보이는 것이지요. 믿음의 사람들이 오늘 우리가 정말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지, 그들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한번 살펴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영적 안목의 사람 아비멜렉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창 21:23)

이제 조약을 맺자고 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나를 위해서, 내 자손을 위해서, 너와 우리 블레셋이 조약을 맺자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