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21:8-11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엉뚱한 선택을 하여 스스로 문제를 자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문제를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일이 한 개인에게 일어나면 그 개인만 고통받으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가 이런 일을 벌이면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것은 바로 국민입니다.
지금 이런 상황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2022년 9월 21일,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예비군 30만 명을 동원하여 전쟁터에 투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발표 이후로 러시아 사회는 뒤집혔습니다. 올 초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전쟁은 러시아 국민에게 텔레비전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닌 바로 나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2,500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 예비군 중에 언제 누가 징집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팔을 부러뜨리면 징집에서 빠진다 하여 자기 팔을 스스로 부러뜨리는 사람도 생겨나고, 러시아 곳곳에서 반전 시위가 일어나며, 인근 접경지역과 유럽으로 탈출하는 러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두 푸틴이 자초한 일입니다.
국내외적으로 출구가 없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사실 따져보면 이 전쟁은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본인 생각에는 빨리 끝날 줄 알았겠지만, 오히려 서방 세계를 자극하여 그들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게 되었고, 지금 푸틴은 사방이 막혀 있는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본인도 지금 후회가 되겠지만, 이제는 돌아갈 길이 없는 막막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아브라함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큰 근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이 근심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초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사명으로 '너는 걱정하라, 근심하라'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문제로 인해 큰 걱정에 빠져 있습니다. 어떻게 풀어가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도 걱정과 어려움이 있지만, 사실 이 걱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기보다 내가 스스로 만든 문제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어떻게 풀어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해답을 찾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과 사라를 돌보셨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삭을 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행동을 따라 하셨다면, 아마 그 가정에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만족시킬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게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그 가정을 위해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 가정에 이삭이 태어났고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 이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립니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창 21:8)
젖을 떼는 날이 왔습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서너 살 정도 되면 젖을 떼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가 되면 부모는 큰 잔치를 베풉니다. 그 당시에는 의료 시설이 미미했고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영아 사망률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그래서 서너 살까지 키우면 이제는 큰 위기를 어느 정도 지나갔다고 여겼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내보여도 되고,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으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 여기까지 올 때까지 아브라함과 사라는 얼마나 가슴을 졸였겠습니까? 불안하지 않았겠습니까? 노년 100세에 얻은 아들이 낳자마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버리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그 시간 동안 혼신을 다해서 길렀을 것입니다. 기도하며 문제가 없도록 돌보았을 것입니다. 그 시간들이 다 지나서 이제는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기가 온 것입니다. 큰 잔치를 베풀고 동네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크게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이 유독 불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바로 하갈과 이스마엘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는 이 시간이 전혀 반갑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회적 관습에 의하면, 본처에게 자녀가 없고 후처에게 자녀가 있으면 당연히 그 후처가 낳은 아들이 상속자가 됩니다. 아브라함의 본처인 사라에게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으면 이스마엘은 자연스럽게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이 자기 것이 될 터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의 배가 불러왔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태어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기를 아마 바랐을 텐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건강하게 3~4년을 지나 젖을 떼고 잔치하는 시간까지 와버렸습니다. 이제 하갈과 이스마엘은 상속자도 아니고 애매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음이 몹시 불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마엘은 선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창 21:9)
여기서 '놀리다'라는 단어를 살펴보기 전에, 지금 이스마엘의 나이를 한번 따져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스마엘이 몇 살쯤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이 86세 때 이스마엘을 낳았고, 13년 동안 이 아이에게 흠뻑 빠져서 살았습니다. 99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다시 부르시며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00세에 이삭을 낳습니다. 이삭이 태어날 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14세입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4세, 이스마엘의 나이 18세입니다.
18살이면 이제는 아이가 아니라 청년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이삭을 데리고 놀린다고 합니다. 그냥 아이들끼리 놀면서 별명 부르고 짓궂게 장난치며 서로 뒤엉켜 싸우면서 놀리고 웃고 우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18살짜리 청년이 4살짜리 아이와 같은 정신연령으로 놀지 않습니다.
이제 '놀리다'라는 단어를 히브리어 원어에서 찾아보면 '차하크'(צָחַק)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조롱하다', '희롱하다'라는 뜻인데, 이 말이 쓰인 용례가 놀랍습니다.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창 3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