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정말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냐”
영호가 내뱉는 이 질문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첫 시퀀스에서 관객은 반쯤 미쳐있는, 누가봐도 불행한 행색의 영호를 마주한다. 달려오는 기차에 소리치는 그 유명한 장면 이후, 영화는 기차를 따라 영호의 타락상을 역순행적으로 비춘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는 첫 시퀀스와 같은 장소이지만, 가장 행복하고 젊은 영호를 보게 된다. 이창동은 영리하다. 영호를 시대적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내세운다.
덕분에 자칫 신파로 흐르거나, 무게감이 실릴 법한 시대를 다루면서도, 영화는 영호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영호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그러면서 내내 그의 타락의 필연성에 대한 부단한 설득을 시도하는데, 처음엔 씹새끼같던 영호가 나중엔 안타까워진다. 그 감정의 기저엔, 당시 현대사 한 켠에 던져진 그 누구라도 영호가 될 수 있었다는 서늘한 생각이 자리한다. (더불어 중간 중간 카메라 워크 역시 몰입감을 더한다)
그 공감을 통해 관객은 영호의 미시사에서 기시감을 느끼고, 초반부에 툭 던져놓았던 90년대의 이야기가, 영호의 절규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영화 속 타인이 보는 영호는 집도 새로 살 정도로 번듯한 사업가이자, 경찰이며, 여자와 썸을 타는 멀쩡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커피값 천원을 떼먹고, 외도를 하고, 고문을 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회식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본다. 겉으로는 멀쩡해보이지만, 그 속은 깊게 얼룩진 영호가 곧 한국 사회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시대 앞에서 군인, 경찰이라는 집단적 명칭으로 퉁쳐진 영호는, 하달된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시대의 피해자이다. 동시에 집단 속 그는 동시대의 다른 피해자를 죽이고 고문하는 가해자이다. 집단은 영호라는 개인에게 부조리를 외주 맡겼고, 그는 결국 죽음이 아니고서는 더러워진 손도, 밟혀버린 박하사탕도 되찾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박하사탕>은 2000년 1월 1일에 개봉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식당에서, 건물 내부에서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운다. 실내 흡연 금지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듯, 20세기의 끝자락에서, 가장 처음 개봉된 이 영화도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요즘은 영호가 되는거 아닌가 하는 긴장감보다는, <버닝>의 종수와 해미가 내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