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 중입니다

자기소개를 할 때 늘 따라붙는 소속과 직업이 없다. 괜히 ‘놀고 있다’라며 상태를 낮추어 부르거나 일하는 사람들이 한심하게 보진 않을까 눈치를 본다.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다. ‘아무도 아닌’ 상태는 벗어나야 할 상태이지, 나를 나타내는 말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계속 일하다 보면 자의로든 타의로든 찾아올 ‘멈춤’을 불안으로 맞이해야 할까. 나를 나타내는 상태로 인정할 순 없을까.

디자인 업계에 겨우 발을 붙였지만, 발을 뻗을 당시의 확신과는 달리 어떻게 발을 두어야 할지 막막했다. 커리어라는 사분면에서 내가 하는 일의 위치는 애매했다. 이다음은 어떤 기울기로 뻗어 나가야 하는 걸까. 연차가 더 쌓이기 전에 다음 목표를 찾아 떠나야겠다는 초조함이 생겼다.

‘물경력 가지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디자인 전공도 아닌데.’ 일하다 보면 얄팍한 감정이 쉽게 솟아 나왔다. 반복되는 마감 속에서 예민해지는 만큼 어떤 면은 한없이 무뎌졌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이게 아니야.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은 이게 아니야. 계속 현재의 나와 일을 깎아내리며 버텼다. 좋아하는 일이고,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닌데.

퇴사를 결심하자마자 바로 실행했다. 나를 나쁘게 대하는 회사를 미련 없이 벗어날 수 있었던 데는 여자친구의 몫이 컸다. 야근 수당 없는 야근 같은 상황에 유난히 크게 화를 내주었고, 다음 이직처를 구하지 못해 초조해할 땐 “언니 쉬어도 돼. 같이 쉬자.”라며 불안을 덜어주었다.

용기를 내어 여자친구와 강릉으로 한 달 살기를 갔다. ‘이래도 되는 걸까?’와 ‘뭐 어때서’가 하루에도 몇 번씩 교차하며 마음을 울렁였다. 일하는 동안 못 했던 글쓰기와 독서를 잔뜩 하려고 캐리어에 책을 가득 실어 갔던 것도 불안을 인지해서였을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세끼 밥 차려 먹고 바닷가를 산책하면 하루가 다 지나갔다. 시간이 나면 하려던 공부는커녕 책 한 권도 건드리지 못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생산적이지 않아도 될까? 조바심이 나다가도 그날 그 시간에 집중하며 지내다 보니 불안하지 않았다. 불안이 가득 차야 할 곳엔 이상한 확신이 자리 잡았다. 일을 안 하고 있는데도 잘 살고 있는 거 같다는 기분. 넌 뭐야. 이상하다.

강릉에서 돌아오자마자 일을 시작하려 했지만, 계획이 어그러졌다. 속상했지만 퇴사했을 때처럼 불안하지는 않았다. 이전에도 2년 정도를 취업하지 않고 보낸 적이 있다. 그때도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이리저리 다녔지만, 결과적으로 디자이너 이력서에 쓸 수 없는 시간이었다.

소속되지 못한 채 불규칙하게 보냈던 시기가 외롭고 무기력했기에 두 번 다시 내 인생에 없을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상태’를 끊어내고 이직을 한 경험은 큰 용기로 남아 있었다.

잠시 멈추어도 언젠간 끝이 있을 거라는 것을 안다. 결과적으로 보면 지금의 ‘멈춤’은 또 언제 올지 모르는 귀중한 시간이다. 마치 연인과 함께한 강릉 한 달 살기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는 시간

멈추고 나니 일상이 비일상이 되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늘어난 시간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일을 벌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가장 처음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두 번의 교통사고를 겪으면서 조수석에 앉는 것도 무서웠고, 교통편이 좋은 서울에 산다는 핑계를 대며 필요를 외면했다.

안중에도 없었던 운전면허를 따고 싶어진 계기는 조수석에 여자친구를 태우고 드라이브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하고 싶어지니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고 두려움도 점점 줄어들었다. 필기시험, 기능시험, 도로 주행. 세 가지 난관에 겁먹고 긴장하고 실패도 하고 있지만, 머릿속은 도로 위를 달리는 앞날의 나를 상상하며 매 순간을 즐기고 있다.

회사에 다닐 때 틈틈이 하려 했던 여가 활동에도 시간을 더 쏟고 있다. 달리기 좋은 가을이 왔다는 마음이 크게 부풀어 달리기 소모임에 가입했다. 소모임은 목표를 설정하고 한 주 동안 목표 달성을 인증하는 방식인데, 뭘 시작하려면 생각이 많고 오래 걸리는 내가 일단 운동화를 신고 나가게 해준다.

한번은 비가 얕게 내리는 밤에 여자친구와 함께 천을 따라 달렸다. 즉흥적인 결정이었고 둘이서 빗속을 달리는 게 처음이었다. 시원한 공기와 촉촉한 물기가 몸에 닿아 옷을 적셨다. 우산이 없어 비를 맞으며 달린 적은 있지만 작정하고 빗속을 뛰어보는 경험이 재미있어 깔깔대며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