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특강 7 - 나를 본받기 바랍니다 (고전 9장)

오늘은 고린도전서 공부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9장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이때까지 우리가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정말 문제 많은 골치 아픈 교회입니다. 요즘 현실 세계에서 그런 교회가 있으면 "나는 이런 복잡한 교회, 이런 시끄러운 교회 못 다니겠다" 할 정도로 심각한 교회였습니다.

일단 교회가 분열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따라 "나는 누구 파, 나는 누구 파" 이렇게 분열되어 있는데, 여러분 만약 우리 교회가 파가 나뉘어서 분열되어 막 싸운다면 교회 오고 싶겠습니까? 그런 갈등들이 있었고, 또 교회 안에 음행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누가 뭐 했다더라, 그런 이상한 일이 있었다더라" 이런 소문들이 막 있으면 교인들이 은혜가 안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결혼의 문제가 있는데, 이 결혼의 문제는 그냥 보통 문제가 아니고 사람들이 차별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결혼한 사람, 결혼하지 않은 사람, 이혼한 사람, 그냥 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다 차별하는 문제입니다. 차별받고 다니고 싶겠습니까? 나도 하나님이 부르신 게 확실한데, 그런데 내 형편이, 내 처지가 여의치 않은데 하는 갈등들이 또 있습니다. 또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한 문제가 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있었는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해결책입니다. 답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오면서, 인간관계 해오면서, 결혼하고 가정생활하고 자식 키우고 여기까지 오면서, 문제 없이 1년 동안 하나도 문제 없이 그냥 살아왔다 하는 해가 있으면 한번 적어 보십시오. 있습니까? 단 한 해도 없습니다. 한 해가 뭡니까? 한 달도요, 하루도요. 단 하루도 우리는 문제 없이 살아온 하루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른 게 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은 사람, 복음이 없는 사람, 신앙이 없는 사람은 답이 없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문제는 있는데 해결책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큼 고난 당해 본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매 맞아 본 분, 예수님처럼 모든 걸 다 버려 본 분, 예수님처럼 모든 걸 다 가져 보신 분이 없습니다. 만왕의 왕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이 땅에 오시고 다 버리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나는 다 잃어도 예수님 보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배신당해 본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배신당해도 예수님 보면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건 해결책인데, 이 해결책은 예수 속에 답이 있습니다. 그 예수 속에 답이 있는 것을 바울이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말 하늘이 무너지고 심각한 문제들이 막 있어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왜요? 우리가 예수 믿으니까, 예수 안에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생각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답이 있고, 예수님 생각하면 흥분할 것도 없고 화낼 일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주 안에서 다 답 찾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래서 이런저런 교회 안의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줍니다. 그런데 이 답은 생각해 보면 바울의 경험이나 바울의 생각에서 나온 답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답이었습니다. 다 예수 안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전부 성경 이야기입니다.

1. 바울의 자기 변호

이제 오늘 바울은 자기 변호를 좀 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하는 자기 변호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변호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바울이 이런 이야기들을 쭉 해 가는데, 글 쓰고 있는 사람, 편지 쓰고 있는 사람 바울에 대한 오해가 있으면, 이 사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 사람들은 바울의 편지나 바울의 설득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자기 변명, 자기 변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제목이 "나를 본받기 바랍니다"입니다. 이런 말을 우리는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자녀에게 앉혀 놓고 "야, 엄마 본받아" 그러면 아이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야, 아빠 본받아" 이러면 아이들이 속으로 그런 말 안 하면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당당하게 "나를 본받기 바랍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바울이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어떤 복음에 사로잡힌 삶을 살았길래 이런 말을 할까요?

1-1. 네 가지 질문

9장 1절을 보시면 바울이 네 가지 부정 의문문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이 네 가지를 던졌습니다. 보통 부정적으로 말할 때는 어떤 느낌입니까? 강하게 말하고 싶을 때입니다. "내가 이것도 먹을 권리가 없냐" 이렇게 말할 때는 "나 먹을 권리가 있잖아" 이런 말입니다.

바울이 지금 네 가지 부정적인 말을 했는데,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그러면 나는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유인이란 시민의 자유인, 나는 법을 지키는 그런 자유인이다 이런 말이 아니라, 죄에서 해방된 자유인이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자유인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내가 사도가 아니냐?" 나는 사도라는 뜻입니다.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봤습니다. 어디서요? 다메섹 도상에서입니다. 그리고 또 네 번째로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나의 열매가 아니냐?" 고린도 교회 성도들, "너희는 내가 수고하고 땀 흘리고 애쓰고 씨 뿌린 열매가 아니냐?"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중에 바울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요? 사도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바울은 사도성의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2절에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다른 사람들, 바울의 사도성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넌 사도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너희는 나를 인정해 줘야 된다는 말입니다.

1-2. 사도의 기준

그런데 그 다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악당들입니까? 나쁜 사람들입니까? 이방인들입니까? 아닙니다. 진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내부의 적입니다. 내부에서 바울의 사도권,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21절에서 22절을 보면,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맥락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의 제자가 원래 몇 명입니까? 열두 명입니다. 그중에 누가 하나 죽었습니까? 가룟 유다가 스스로 죽었습니다. 몇 명이 됐습니까? 열한 명입니다. 그러면 열한 명으로 다니면 됩니까, 안 됩니까? 꼭 한 명 채워야 합니다. 그 한 명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왜요? 유대인들은 12라는 수를 완전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은 하늘의 수고, 4는 땅의 수고, 하늘의 수와 땅의 수가 더해진 7이 완전수고, 하늘의 수와 땅의 수가 곱해진 12가 또 하나의 완전수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완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완전치 않았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배신했고, 물론 다 배신했지만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를 채우고 싶은 것입니다. 안 채우면 어떻습니까? 12라는 이상한 강박, 전통의 강박에 사로잡혀서 하나를 채우는데 그 채우는 기준이 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