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는 배필 (창 2:18-25)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철학자이자 작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 이 두 사람은 각자의 영역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계약 결혼을 발표한 일입니다. 두 사람은 대학 교수 자격 시험을 앞두고 사랑에 빠졌고, 시험 결과 사르트르가 수석, 보부아르가 차석을 차지합니다. 그 후 1929년에 계약 결혼을 발표했습니다.

계약의 조건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서로 사랑하되 상대방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이해하고 용납한다. 둘째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셋째는 경제적인 것은 스스로 알아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약 조건에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계약이 발표되자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지성인들 사이에서 찬반 논의가 벌어졌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결혼관과 가족관을 해치는 행위이며, 지성인들이 어떻게 이런 결정과 행동을 할 수 있느냐고 비판했습니다. 반면 찬성하는 사람들은 결혼과 가정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며, 역시 지성인들답다고 환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찬반 양론의 두 부류가 모두 동의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얼마나 가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관계는 곧 끝장나게 될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1929년에 이루어진 계약 관계가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난 1980년까지 이어졌습니다. 무려 51년 동안이나 그들의 계약 관계가 계속된 것입니다. 물론 사르트르의 여성 편력도 있었고, 보부아르가 다른 남성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으나 그들의 계약 관계는 51년 동안이나 이어져 왔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사람들은 이들의 결혼 생활을 다시 재평가합니다. 51년 동안 이어졌으니 성공한 결혼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두 사람의 결혼이 성공한 결혼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결혼의 모델이 됩니까? 이 두 사람은 그들이 생각한 결혼관과 가족관을 '계약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51년 동안 지속해 왔습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관, 결혼관이 있습니다. 물론 내가 생각한 대로 결혼 생활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저마다 생각한 대로 그 과정을 성실하게 이루어 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첫 번째 가정을 세워 주신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정을 어떻게 세워 가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과 결혼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우리 가정을 한번 비추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디자인하신 그 모습대로 살고 있는지, 혹시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혹시 그 문제가 하나님께서 원래 디자인하신 모습대로 살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닌지, 지금이라도 고칠 의도는 없는지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가정을 대입하고 살펴보시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돕는 배필의 의미

먼저 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한가운데 아담을 두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혼자 사는 것이 별로 좋지 않게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지 않게 보셨다는 말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자녀들 중에 30대 후반이 되고, 40대가 되고, 50을 바라보게 되어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자녀를 보면 부모의 가슴이 타들어 갑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해서 아이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아야 되는데, 왜 우리 자식은 저렇게 살아야 되나 걱정이 머리끝까지 올라옵니다.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들이 느끼는 '보시기에 별로 좋지 않은 모습'처럼 하나님도 그런 느낌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혀 다른 의미로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보셨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대자연을 아담에게 맡겨서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그의 동역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일을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일하는 아담을 하나님이 가만히 지켜보고 계시니, 사고의 확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그 문제를 뛰어넘어 갈 동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간혹 자기 독선과 교만과 아집에 빠질 때도 있는데, 혼자 있다 보니 그것이 독선인지 아집인지 아무도 그에게 알려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라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기만의 세상에 갇히기 쉽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짓겠다고 결정하셨습니다.

1-1. 에제르 케네그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돕는 배필'이라는 의미와 우리가 지금 관습적으로 생각해 왔던 '돕는 배필'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특별히 우리나라와 동양 문화권에서 '돕는 배필'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갇혀 있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 주가 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부가 됩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은 우리나라 동양 문화권에서는 주로 남편이 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은 아내가 됩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주종 관계가 있는 것을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남편이 주가 되고 아내가 부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주종 관계가 형성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돕는 배필의 관계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그런 의미로 돕는 배필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돕는 배필'의 원어 의미는 '에제르 케네그도'(עֵזֶר כְּנֶגְדּוֹ)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에제르'(עֵזֶר)는 '도움', 즉 신적인 도움을 의미합니다. '케네그도'(כְּנֶגְדּוֹ)는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동등하다', '마주 보고 바라보다', '반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돕는 배필로 여자를 세우셨다는 말은 서로 동등하게, 아담이 여자를 동등하게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제대로 잘 살피고 바라보면 그 사람의 약함이 보입니다. 그 사람의 약점이 보이고 부족한 부분이 보입니다. 잘 살펴보면 내가 가진 강점으로, 내가 부여받은 달란트로 그 사람의 약점과 단점을 채워 주게 됩니다. 서로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면, 서로가 다른 방향과 다른 데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어디가 약한지,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능히 살펴보면 그분의 약점과 단점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동등한 눈높이에서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살피고 바라봐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지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