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해 장기간 나를 만나지 못한 친구들께. 그간 저에게는 중대하고 사소한 변화들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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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주 듣는 팟캐스트는 <릭 앤 모티>의 두 작가인 제시카 가오와 댄 하몬의 'Whiting Wongs'이다. 헐리우드에서 작가로 활동 중인 두 사람이 인종주의와 성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팟캐스트다. <릭 앤 모티>가 시즌3에 이르러 처음으로 여성 작가들을 기용했을 때 팬보이들은 다양성이 <릭 앤 모티>를 망칠 거라고 각종 혐오발언을 쏟아냈다. 그리고 중국계 미국인 여성인 제시카 가오가 각본을 쓴 '피클 릭'은 <릭 앤 모티>에서 가장 열렬한 사랑을 받은 기록적인 에피소드로 남아있다. <릭 앤 모티> 굿즈들을 찾아보면 반 이상이 피클 릭을 활용한 상품들이다. 피클 릭이 그려진 티셔츠, 피클 릭 모양 텀블러, 피클 릭 맛의 프링글스, 피클 릭 모양 콘돔, 피클 릭으로 된 피클 등.

Whiting Wongs

'사십대백인이성애자시스젠더남성' 제작자 겸 작가가 헐리우드의 인종과 젠더 문제에 대해 논해도 되는 것인가? 되고 말고 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수신료 내는 방송에서 쥐어준 발언권도 아니고 자기가 좋아서 떠드는 일인데... 마음에 안 들면 안 들으면 그만이다. 어쨌든 이 방송은 똑똑하고 웃기고 합이 좋은 두 작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머를 잃지 않고 중요한 이야기를 '굳이' 한다. 듣다 보면 최선의 과거와 평범한 미래의 최고로 웃기면서 진지한 대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이 방송을 찾아듣는 희한한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나는 당신을 트롤링하고 있습니다"와 같이 명쾌한 메시지를 보내는... 하여간 이런 팟캐스트가 있으니 코미디-성차별-인종주의에 관심 있는 분들은 들어보셔도 좋을 것 같다. 내가 이 팟캐스트를 가장 '자주' 듣는 이유는, 재밌어서기도 하고 영어라서 제대로 알아 들으려면 여러 번 반복 재생해야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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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넷플릭스에 올라와있는 <아틀란타>를 보기 시작했다. 단지 제시카 가오가 그 해에 가장 재밌게 본 시리즈가 도널드 글로버의 <아틀란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도널드 글로버가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았다. 작년에 본 가장 좋은 드라마가 <플리백>이었는데, 비슷한 톤의 코미디라고 할 수 있겠고, 마찬가지로 배우가 각본과 주연을 겸했다는 사실도 재밌다. 얼마 전 두 사람이 같이 새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더 흥미롭다.

여기서 인정해야 하는 것은 내가 힙합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씩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누군가 힙합에 지나친 거부감을 보이는 나에게 '너는 사실 디나이얼 일 것'이라고 말하기에 모욕감으로 씩씩댄 경험이 있다(전형적인 디나이얼의 반응이다). 이제는 대장부답게 인정하기로 한다. 나는 힙합 사람들의 드라마 <아틀란타>를 보고 있으며, 도널드 글로버가 차일디시 갬비노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이따금 힙합을 듣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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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고통스러운 고백은 내가 이미 두 번의 리뷰를 쓴 드라마 <삼국지>(신삼국)에 진심으로 매료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한동안 리뷰를 쓰지 않은 것은 삼국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럽기 때문이었다. 고전 알탕 서사를 비웃기 위해 감상을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진심으로 감동해버렸다니... 아시아에서 페미니스트로 사는 한 수많은 플레저에 수많은 길티가 따르는 법이다. 당신은 서점에서 [결국 이기는 사마의]라는 책을 발견하고 가슴이 뛰어버린 페미니스트의 자괴감을 아는가? 그러나 뭐 어쩔 것인가. 나는 또 하나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삼국지>는 대단한 텍스트이며, 당연히 여성혐오적이고, 삼국지 안 본 사람보고 훈수 두는 이들은 여전히 비웃음을 사야 마땅하고, 유비 삼형제는 똘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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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변화는 나에게 꾸준히 해야하는 일이 생겼다는 점이다. 제가 좋아하는 동료들과 함께 팟캐스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제목은 '최하나 장성란의 희극지왕'이다. 웃긴 것도 좋아하고 웃기기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코미디 영화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한다. 3월 4일에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