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일, 일하고 있습니다

나를 ‘디자이너’라고 지칭하기가 참으로 머쓱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자연스레 스스로를 디자이너라고 소개한다. 소규모 스튜디오의 디자이너로 일하며, 어느새 포트폴리오에는 그 시절 저마다의 추억을 가득 머금은 작업들이 많이 쌓였다. 클라이언트들과의 소소한 이야기, 그 당시 작업을 진행했던 나의 상황과 심경 등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디자이너에게 포트폴리오란 그야말로 ‘내 새끼’ 같은 존재가 아닐까.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작업을 진행했던 나로서는 참으로 농도 짙은 애정을 보낸다.

디자인 시안 선택은 클라이언트가 하지만 아이디어의 도출부터 표현까지는 모두 디자이너의 몫이다. 내가 재직했던 스튜디오는 하나의 기획안을 가지고 여러 디자이너가 정해진 기간에 각자의 시안을 2개에서 3개 정도 디자인한다. 그리고 내부 회의를 거쳐 클라이언트에게 보낼 시안들을 추려낸다. 시안에 번호를 붙이고 담당 디자이너가 디자인 콘셉트를 설명한 내용을 첨부해 제안서를 보내는데 이때 시안의 넘버링은 숫자가 될 수도 있고 알파벳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시안을 보내고 나면 클라이언트 쪽에서 최종 시안을 선택하고, 필요에 따라 그 시안을 수정, 보완하는 작업을 거쳐 최종안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때에 따라서는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투입 되는 경우도 있다. 다양한 매체에 게시하기 위해 새롭게 풀어내야 하는 디자인의 양이 많을 경우에는 협업을 하지만 대부분은 각 디자이너 혼자만의 작업이다. 디자이너에 따라 풀어내는 방향과 방식은 다양하다. 작업을 진행할 때마다 다른 디자이너의 시안을 보며 시야를 넓힐 수 있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가끔은 다른 스튜디오처럼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협업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나오는 결과물은 온전히 나의 포트폴리오가 된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정해진 기간 내에 나의 이름을 걸고 나오는 작업이니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하루하루 안달을 내며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핫플레이스와 다양한 형태의 레퍼런스에 연연하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디자인이라는 것을 잘하고 싶었다. 많은 클라이언트와 함께 하는 직업의 특성상 그 속에서 가끔 나의 목소리가 너무 작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각자의 취향이 단 1%도 첨가되지 않은 선택이 있을 수 있을까? 너도 나도 각자의 의견을 얹는 디자인의 세상에서 여러 이유의 외면을 견디고 다음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은 때론 무겁게 느껴진다. 최선을 다했지만 선택받지 못하는 경우, 무기력한 기분은 덤이고 어쩐지 생기는 슬픈 마음과 다음번엔 기필코 나의 시안이 선택받아야 한다는 쓸데없는 의무감까지 들곤 했다. 사실 내 노동의 가치는 이미 제출된 시안과 성실하게 참여한 해당 프로젝트의 무사 종결로 증명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여러 상황에 의해 나의 시안이 선택되지 않는, 그 소화하기 힘겨운 결말을 반복하며 살아갈 나의 많은 날들이 걱정됐다.

절대적으로 작업에 필요한 시간을 넘어서면 가끔은 시간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시안의 끝을 끝이라고 시원하게 내뱉기는 언제나 조심스러운 것 같다. ‘조금만 더 하면···’하는 아쉬운 마음에 항상 미련을 뚝뚝 흘리며 마지막까지 시안을 붙잡고 있다. 디자이너로 살아보는 인생이 처음인지라 매 프로젝트마다 미련과 집착으로 디자인을 한다. 인생 2회 차부터는 ‘쿨한 디자이너 되기’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가끔은 디자인 초안단계부터 막히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속절없이 흘러가버리는 시간이 더욱 매정하게 느껴진다.

디자인을 할 때 시간은 나에게 불안한 존재이다. 부지런히 뒤따라가는 나를 뒤로 한 채 저멀리 휘적휘적 걸어나가버리는 매정한 존재. 그러다가 가끔 나와 함께 발맞추어 걸어줘서 나를 감동시키기도 하는 그런 존재. 쫓아가기 힘든 기분파다.

주 2일, 뜨개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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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디자인의 시간에 반해 나에게 평안을 주는 존재가 있다. 뜨개를 하는 시간. 그 시간은 나에게 평안한 존재이다. 절대로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지않고 언제나 나와 함께 발맞추어 걸어가주는 친구. 울퉁불퉁 서툰 나의 모습까지도 정직하게 담아주어 오롯한 나를 마주할 수 있는 시간. 같은 시간이지만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불안하기도 하고 평안을 느끼기도 한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주말 아침이면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로 커피를 내린다. 간단히 세면과 양치를 하고 가장 좋아하는 머그컵을 꺼낸다. 온 집 안에 진한 커피향이 퍼지고 그 따뜻한 향기를 만끽하며 크고 볼이 깊은 머그컵에 커피를 가득 담는다. 점점 온기를 찾는 머그컵을 한 손에 쥔채, 커피 온도와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의 잔잔한 노래까지 곁들이면 비로소 황금같은 주말 아침이 시작된다.

거실 한켠의 뜨개 카트 속에서 한 쪽 팔이 짧은 니트를 꺼내어 바늘을 재정비한다. 진한 커피향과 흐르는 음악 위로 나무바늘이 경쾌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아침을 깨운다. 가지런히 정렬되어가는 V(브이)들을 보고있자면 마음은 차분해진다. 흐르는 시간에 따라 캐시미어가 섞인 연분홍 니트는 구름처럼 부풀어간다. ‘이번달에는 완성하겠구나’ 하는 확신과 함께 따뜻한 커피를 한모금 들이켠다.

동대문에는 매 계절마다 새로운 실들이 쏟아져나온다. 그 색의 향연 앞에 서면 지갑이 닫힐 새가 없다. 우리가 배웠던 색의 관계성은 무효가 되고 내 키보다 높게 쌓인 실들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양한 질감들의 실들은 오늘의 계절을 하루 빨리 보내주고 내일의 계절을 기다리고있다. 여름엔 종이와 면으로 이루어진 실들, 겨울엔 울과 캐시미어, 그 중 얇은 실들이 간질간질 매여 있는 모헤어 실은 보송보송 솜사탕을 떠오르게한다. 대부분은 볼 형태의 실들을 구매하는데 여러 카페들과 스토어에서 판매하는 캐시미어가 섞인 콘사🌽 역시 충분히 매력적이다. 모든 실은 한 번 살 때 넉넉하게 구매하는 편이다. 같은 제조사의 실이라도 한달 전에 산 컬러와 한달 후에 사는 컬러는 미세한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쪽 팔의 색이 미세하게 더 진한 니트를 입고 싶지 않다면, 넉넉하게 구매하는 게 좋다. 니트 조끼가 예쁠지, 긴팔 니트가 예쁠지 치열한 고민끝에 결제를 한다.

주문한 실들이 도착하면 와인더💡를 꺼내 거실 테이블에 설치를 한다. 모헤어와 캐시미어 두가지의 실을 모아 하나의 볼 형태로 정리한다. 압축되어 있던 콘사들이 다시 몽글몽글 숨을 찾아 부풀며 하나둘 상자를 채워나가는걸 보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도르륵 도르륵 돌아가는 와인더 소리와 엉킴없이 모이는 실들은 자꾸 다음을 기대하게 한다.

주말의 아침이나 지친 하루 퇴근 후, 잔잔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뜨개를 하면 나를 분노하게하는 뉴스, 고민거리들을 잊고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 편물을 살피며 다음 코를 이어나간다. 대단히 어려운 무늬를 넣는다거나 화려한 컬러의 배색을 넣는 뜨개는 아니지만 한 코 한 코 쌓아 단정한 형태의 니트를 떠내려간다. 이번 편물이 끝나고나면 무슨 실로 어떤 새로운 작품을 만들지 기대감이 가득 차오른다.

나의 시간과 노력이 정직하게 비례하며 한 코 한 코 쌓여 하나의 편물과 소품이 되어가는 과정을 바라보면 스스로가 굉장히 기특하게 느껴진다. 서툰 모습이 싫어 열심히 풀었다 다시 뜨기를 반복해도 아직 익지 않은 손이 떠 내려간 편물은 균일하기 어렵다. 나의 서툰 모습도 인정하고 넘어가야만 다음 단을 쌓아올릴 수가 있다. 그런 과정을 지나쳐야만 완성이 된다. 열심히 뜨개를 하는 건 나지만 나의 모든 모습을 정직하게 담아내는 그 소품들까지도 기특해 보이는 이유다.

불완전한 완성을 자주 마주치자 마음에 담대함이 생겼다. 뜨개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알테지만 실을 사는 순간부터 나는 하나의 편물과 소품을 완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멋진 도안을 발견하고 그 도안에 어울릴 만한 실을 고를때의 기쁨. 정당하게 나의 시간과 노력을 지불하고 나면 가감없이 말 그대로의 생산자인 나를 마주한다. 가타부타 평가할 타인이 없고 오롯이 나와 나의 작품만이 있는 고요한 뜨개의 세상.